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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497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동희

[정의]

1392년에서 1863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된 시기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진안 지역은 조선 건국 후 진안현(鎭安縣)용담현(龍潭縣)의 2현으로 재편되었다. 진안 지역은 웅치 전투, 기축옥사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행정 구역의 변천]

조선 시대에 용담현은 본래 청거현(淸渠縣)으로 금산의 속현이었는데 1313년(충선왕 5) 용담현으로 개칭되면서 독립하였다. 진안현마령현(馬靈縣)은 전주부의 속현으로 있다가 고려 멸망 직전인 1391년(공양왕 3)에 독립하였다.

조선 건국 후 1413년(태종 13) 마령현진안현에 통합하고, 감무를 진안 현감으로 고쳤다. 용담현은 그대로 현령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진안 지역은 고려 시대 진안현·용담현·마령현 3현에서 조선 건국 후 전라좌도에 속한 진안현용담현 2현으로 재편되었다. 조선 시대 진안현은 종 6품의 현감이, 용담현은 종 5품의 현령이 부임하는 곳으로 용담현진안현 보다 한 등급 높았다. 실제로는 진안현이 면적과 인구수에서 용담현 보다 컸음에도 용담현의 격이 더 높았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1646년(인조 24) 충청도 이산(泥山) 사람 유탁(柳濯)의 모역에 연루되어 진안현이 폐지되어 장수현에 합쳐지고, 용담현은 현령관에서 현감관으로 강등되었다가 1655년(효종 6)에 본래대로 환원되었다. 1895년 부·목·군·현 등의 읍호를 군으로 통일하면서 진안군과 용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용담군이 진안군에 통합되어 현재의 진안군이 되었다.

[군사 편제]

조선 전기의 계수관 체제에서 진안현용담현은 남원 계수관 관할이었고, 1466년(세조 12) 이후 진관 체제에서도 남원 진관에 속했다. 임진왜란 후 신설된 진영 제에서 진안현용담현은 전라도 좌영[남원, 이후 운봉]에 속하였다.

[교통 시설]

조선 시대에 진안에서 한양까지는 580리(里)로 7일 거리이며, 전라 감영까지는 서쪽으로 90리로 하루 거리였다. 용담에서 한양까지는 557리로 7일 거리이며, 전라 감영까지는 남쪽으로 130리로 이틀 거리였다. 조선 시대에 진안현단령역(丹嶺驛)이, 용담현달계역(達溪驛)이 있었다. 단령역은 지금의 진안읍 단양리에 해당하며, 달계역은 지금의 용담면 월계리로 추정된다. 진안 지역의 2개 역은 모두 금산의 제원역에 속했다.

[호구]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진안군의 호구 수는 169호 772명이고, 용담현의 호구 수는 86호 274명이다. 조선 후기 1789년(정조 13) 『호구총수』에 등재된 호구 수는 진안현이 14개면 138개리에 5,765호 2만 2210명이고, 용담현이 5개면 84개리에 3,155호 1만 2860명이다. 진안현용담현을 합하면 1789년 진안 지역의 호구 수는 19개면 222개리에 8,920호 3만 5070명이다.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진안현의 토성(土姓)은 이씨(李氏)·전씨(全氏)·백씨(白氏)·한씨(韓氏)·유씨(庾氏)이다. 마령의 토성은 한씨(韓氏)·송씨(宋氏)·장씨(張氏)·가씨(價·賈氏)이며 망성(亡姓)은 김씨(金氏)이고 속성(續姓)은 전씨(全氏)·이씨(李氏)이다. 용담현은 토성이 고씨(高氏)·문씨(文氏)·임씨(林氏)·염씨(廉氏)·가씨(賈氏)·임씨(任氏)이고 동향(銅鄕)의 토성은 가씨(賈氏)이다.

조선 후기 진안 지역의 성씨는 영조 시기의 『여지도서』에 의하면 진안현경주 이씨·수원 백씨·천안 전씨·김해 김씨·완산 최씨·여산 송씨·옥야 장씨·남양 홍씨·동래 정씨·영산 신씨·함양 오씨·전주 유씨·밀양 박씨·조양 임씨·남원 양씨·거창 신씨이고 용담현제주 고씨·용담 염씨·나주 임씨·풍천 임씨 등이었다.

[주요 사건]

조선 시대에 진안 지역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천명을 받은 곳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태조가 신선으로부터 금척(金尺)을 받는 꿈을 꾸었으며, 그 현장이 마이산(馬耳山)이라고 한다. 마이산에는 태조가 황산 대첩 후 돌아오는 길에 머물렀다는 주필대(駐蹕臺)가 있다.

진안 지역에서는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가 발생했다. 홍문관 수찬을 지낸 전주 사람 정여립(鄭汝立)선조의 미움을 받고 낙향하여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시름을 달래다가 모반으로 몰려 이곳에서 죽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3년 동안 동인(東人) 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진안 지역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유명한 웅치 전투(熊峙戰鬪)이 전개되었던 곳이다. 1592년 일본군이 웅치[곰티재]를 넘어 전주로 들어가려 하자 김제 군수 정담을 비롯한 조선군이 결사 항전하였다. 조선군은 비록 패했지만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혀 전주성을 수호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감복하여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의로운 용사들에게 조의를 표한다.’는 표목을 세워 주었다.

진안 지역의 마이산은 조선 말 호남 최초의 창의라고 일컬어지는 호남 의병 창의 동맹이 결성된 곳이다. 1907년 이석용을 비롯한 우국지사들이 이곳에 집결하여 호남 의병 창의 동맹을 결성하고 황단(皇壇)을 쌓아 일본을 내칠 것을 맹서하는 제를 하늘에 올렸다. 1925년 최익현송병선의 제자들이 모여 태조의 주필지이자 의병 창의지인 이곳에 이산묘를 건립하고 우국 정신을 이었다.

조선 시대 진안 지역의 문과[대과] 급제자는 진안현이 11명이고 용담현이 2명으로 총 13명이었다. 진안 지역은 산간 고을로서 중앙으로의 진출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조선 건국 시기 새 왕조를 창업하고 임진왜란과 조선 말에 국난을 극복할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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