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09
한자 丙子胡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태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장소 남한산성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정의]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전라북도 진안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의병이 일어난 전쟁.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북방에서 누루하치[努爾哈赤]가 여진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건설하고 1627년(인조 5)에 조선을 침입하자 무방비 상태였던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이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대하여 조선에 압박을 가하면서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義)로 바꾸자고 요구하고 아울러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 명을 요구했다. 1636년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고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 태종이 직접 청군 7만·몽골군 3만·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경과]

청이 침입하자 인조는 왕자 등을 강화도로 피난시킨 다음 자신도 강화도로 가고자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남한산성 안에 있던 군사는 1만 3000명이었고,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兵使)에게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시키는 한편, 명나라에 병을 청했다. 그러나 전국에서 동원된 군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붕괴되었고 명은 조선에 파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0일을 버티면서 청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청의 군대가 강화도를 함락하고 왕자 등을 포로로 삼은 뒤 남한산성을 향해 공격하자 결국 청에 항복하기로 하였다. 1637년 1월 30일에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진안 의병의 활동]

병자호란 당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에서는 전 참의 정홍명(鄭弘溟)이 의병을 이끌고 공주에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져 해산하였다. 진안 지역에서는 전동흘(全東屹)이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적장이 감탄할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전동흘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한 뒤 세자와 봉림 대군이 청에 인질로 끌려가게 되자 세자의 배종무관(陪從武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동흘은 청의 국방 태세, 군사 배치, 요새 등을 조사하여 군사 전략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고 한다.

또한 정동협(鄭東俠)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응철·전응종 형제 및 신성식과 죽기로 맹세하고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과천까지 북상하였으나 강화가 성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진안 지역에서 창의하여 청군의 포위를 뚫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용맹을 떨친 전동흘이나, 비록 전공은 세우지 못하였지만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였던 정동협 등의 국난을 극복하려는 정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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