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08
한자 壬辰倭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태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6월 - 일본군 진안 지역 점령
종결 시기/일시 1592년 7월 - 일본군 진안 지역에서 철수
발생|시작 장소 웅치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옛웅치길 42[세동리 981]지도보기|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종결 장소 웅치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옛웅치길 42[세동리 981]|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전라북도 진안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진안 지역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였으며,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길목인 웅치에서 관군과 의병이 사투를 벌이고 안덕원에서 격퇴함으로써 호남을 지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호남 지역을 점령하지 못하여 전쟁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일본군은 정유재란 시기에 전라도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아 진안 지역을 비롯한 전라도 전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속전속결 전략으로 북상하여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피난하고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를 보이자 임진강에서 회의를 한 후 조선의 각 지역을 분할 점령하여 군수 물자를 조달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의 공격 목표에서 벗어나 있던 전라도 지역에도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경과]

전라도 방면을 담당한 일본군의 고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는 임진강에서 병력을 이끌고 경상도 선산 지역으로 남하하여 황간 지역을 거쳐 전라도 무주 금산 지역을 공격하였다. 6월 23일 금산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6월 말에 용담을 거쳐 진안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진안 방면에서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웅치(熊峙)를 공격하였으나, 김제 군수 정담(鄭湛) 등 관군과 의병의 사투에 타격을 받았고 전주 안덕원 부근까지 진출하였지만, 동복 현감 황진(黃進)에게 패배하여 진안으로 철수하였다. 일본군은 진안 지역에 머물면서 약탈을 자행하다가 7월 중순에 금산으로 철수하였다. 금산으로 철수한 일본군은 다시 전라도로 침공하려다 이치(梨峙) 전투에서 동복 현감 황진과 광주 목사 권율(權慄)에게 패하여 돌아갔고, 충청도 옥천 지역의 의병장인 조헌(趙憲)의 공격으로 금산성 방어에 치중하다가 9월 17일에 경상도로 철수하였다.

정유재란 시기에 일본군은 병력을 좌·우로 나누어 전라도 지역을 집중 공격했다. 좌군은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전주를 공격했고, 우군은 황석산성에서 방어하던 조선군을 격파한 후 육십령을 넘어 진안을 거쳐 전주로 들어와 좌군과 합세하여 전라도 전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순천과 사천으로 퇴각해 저항하였고, 이후 철수를 결정하면서 전쟁이 종료되었다. 정유재란 당시 진안 지역에서의 일본군 활동은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진안으로 들어오자 진안 현감 오장(吳長)은 일본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임실 지역으로 물러났지만, 김수(金粹)·김정(金精) 형제 등이 의병을 모아 웅치 전투에 참전하여 건지산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홍문관 정자로 성균관 학유를 지낸 오빈(吳玭)고경명과 더불어 금산 전투에 참전하였고 이후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용담 지역의 양간(梁諫)은 무과에 등제한 후 선조를 수종하여 선무 원종 공신에 책봉되었다. 한편 노비 신분이었던 이성 난향(李姓蘭香)은 진안을 점령한 일본군이 주인인 호조 참판 홍습(洪濕)의 피난처를 추궁하며 고문을 가하자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진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진안 지역은 전라도의 동부 산간 지대에 위치하여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부의 동쪽 울타리와 같은 곳이었다. 특히 당시 진안과 전주의 경계를 이루던 웅치는 전주와 전라도 방어를 위한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웅치 전투는 전라도를 방어하여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전투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정유재란 시기에는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유린되는 참상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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