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018
한자 民俗文化-儒敎文化-元江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진안의 8명당 중 하나인 원강정 마을]

원강정 마을은 진안에서 명당으로 손꼽히는 8명당 중의 하나로 사당, 서원 등 유교 문화와 당산제, 들독, 용대기 등 민속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진안 지역에는 8명당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길지를 일컫는 말이 있는데 원강정 마을은 그 중 하나이다. 가치(歌峙)[부귀면 황금리]의 옥녀창가(玉女唱歌), 송대(松臺)[진안읍 운산리]의 행주형(行舟形), 반월리(半月里)[진안읍]의 운중반월(雲中半月), 평장리(平章里)[백운면]의 오선위기(五仙圍碁), 강정리(江亭里)[마령면]의 광대봉(廣大峯), 동창리(東倉里)[백운면]의 선인무수(仙人舞袖), 좌포리(佐浦里)[성수면]의 보필(輔弼), 좌산리(佐山里)[성수면]의 군신회조(群臣會朝) 등을 진안의 8명당이라 칭한다.

원강정 마을은 풍수적으로 연화도수 형국이라고 전해진다. 마이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광대 모습과 같이 익살스럽다고 하여 붙여진 광대봉을 주산으로 삼고 있으며, 합미성이 있다는 용두봉(龍頭峰)을 청룡, 성산을 백호로 감싸 안은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맑고 맑은 물을 제공하는 섬진강이 마을 앞으로 흐른다. 내동산을 안산으로 삼고 있는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는 갈마음수(渴馬飮水)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청룡 맥인 용두 봉우리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이 마을에 홍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에 찾아오는 스님을 무척 학대 했다. 어떤 스님은 ‘때때형’까지 당했다. ‘때때형’이란 삼베 방망이 속에 콩을 집어넣고 이를 머리에 둘려 메게 한 다음 삼베 방망이에 물을 뿌린다고 한다. 그러면 콩이 부풀어져 머리를 압박하게 되어 고통을 준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스님을 학대하자 어느 날 명승이 찾아와 마을을 보니 물줄기가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것을 보고 이 물줄기를 마을 가장자리로 흐르게 하면 마을이 더욱 번창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홍씨 집안을 해코지 할 요량으로 했던 말이다. 그래서 용두봉 맥을 잘라 물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이후 홍씨 집안은 망했다. 용의 머리를 잘라 놓았으니. 잘라진 바위에서는 날이 궂으면 피가 보인다고 한다. 지금도 맥이 끊긴 모습을 볼 수 있다.

[원강정 마을 마을과 지명 유래]

원강정 마을은 삼국 시대에 백제 땅에 속해 529년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을 뒤에 있는 광덕사와 동쪽에 있는 성터, 서쪽에 있는 합미성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조선 선조천안 전씨, 영산 신씨, 동래 정씨, 남양 홍씨, 연안 송씨 등 5성씨에 의하여 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마을에 쳐들어온 왜군을 피해 현재 마을 비각 뒤에 있는 당산나무에 몸을 숨겨 살아난 뒤 거의(擧義)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오성 동계(五姓洞契)를 맺어 교유해 왔는데 이를 강창 오현(江昌五賢)이라 칭하였다. 이를 기념하는 비문이 마을 앞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원강정 마을에는 전씨와 송씨가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강정리란 마을 이름이 실제 등장하는 때는 조선 시대 정조 때에 편찬된 『호구총람』[1789]에 처음 등장한다. 강정 마을은 북수골(北峀谷) 계곡물이 마을 한가운데로 흘러 마을 앞 소(沼)가 형성되어 있어 강창(江昌)이라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 때 강정(江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강정 마을 회관 뒤에 보(洑)가 있어 예전에는 그곳에만 살았는데 이곳을 마을 안쪽이라 하여 ‘안말’, ‘안뜸’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강정 마을 북쪽에 있다 하여 강북(江北)이라 부른다. 마을 남쪽을 ‘바깥말’이라 했는데 이곳에 창고가 있어 ‘창앞’이라 불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강정 보다는 강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강정 마을 전통으로서의 유교 문화]

원강정 마을은 누구나 방문하면 한눈에 보아도 역사적 전통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는 영산사(靈山祠), 영산 서원(靈山書院), 쌍벽루(雙碧樓), 강정대(江亭臺) 장수재(講修齋) 등 천안 전씨의 전통과 관련 되는 사당과 서원이 있다, 또한 연안 송씨의 전통을 말해주는 구산 서원(龜山書院), 수선루(睡仙樓) 등이 산재해 있다.

마을의 형성과 관련되는 강정 오현비(江亭 五賢碑)가 마을 앞 당산에 위치한다. 오현비에는 강정 오현 즉 천안 전씨 규암(葵庵) 전계종(全繼宗), 영산 신씨 운계(雲溪) 신기(辛騏), 동래 정씨 이은(駬隱) 정대수(鄭大壽), 남양 홍씨 운암(雲庵) 홍필(洪滭), 연안 송씨 운포(雲圃) 송대홍(宋大弘) 등이 임진왜란 때 비각 옆에 있는 당산나무에 몸을 숨겨 살아난 뒤 의거한 내력이 기록 되어 있으며 이들 오현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오현사가 창건되어 마을 주민 전체가 모여 제사를 지낸다. 그

밖에도 완왈루(琓曰樓), 영계 서원(靈溪 書院), 영계사(靈溪祠), 진안 강정리 근대 한옥[등록 문화재 191호] 등 유적이 있을 뿐 아니라 마을 주변에는 보흥사(寶興寺)강정리 5층탑, 합미성 터 등도 함께 있다.

[마을 공동체로서의 당산제]

원강정 마을 당산제는 음력으로 정월 초이튿날 밤 12시에 모셔진다. 제는 유교식으로 삼헌관으로 진행된다. 당산은 앞 당산과 뒷 당산 두 곳이다. 제관은 생기 복덕에 맞춰 정하고 제 모시기 보름 전 부터 기우한다. 이때 당산이나 제관 집, 밑집[음식 장만하는 집] 등은 금줄을 치고 황토 흙을 뿌려 집안에 잡인이나 개고기를 먹어 다거나, 상가 집에 다녀온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비용은 당산 답 2 마지기에서 나온 것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밑집에서 준비한다. 이때 제에 사용 되는 물건은 모두 새로 구입하며 제가 끝난 후 밑집에 준다. 원강정 마을에서 당산제에 필요한 품목을 적어놓은 몰목기(物目記)가 있다. 여기에는 당산제에 필요한 제물뿐 아니라 접시, 사발, 향, 소지 종이 등 당산제 모든 준비 용품이 기재되어 있다.

밑집에서 준비하는 물목(物目)은 아저(兒猪) 1수(首), 계(鷄) 2수(首), 명태(明太) 7미(尾), 편작(片雀) 1편(片), 건포(乾布) 2관(貫), 황표(黃票) 2승(升), 대책(大策) 5합(合), 제석(祭席) 1기(技), 단향(檀香) 1편(片), 척 1속(束), 경미 1승(升) 5합(合), 반미(飯米) 1승(升) 5합(合), 필미 7승(升), 계주(癸酒) 2승(升), 탁주(濁酒) 2승(升), 옹기 시루 1개, 병 1개, 승(昇) 1개, 투가리 2개, 사기 접시 5개, 깍정이 2개, 종발 2개, 입사발 4개, 오목 사발 3개, 등(燈) 2개, 폐지(弊紙) 10판(板), 소화지(消火紙) 5매, 광(筐) 1개, 들기름 2합(合), 송신(松薪) 2부, 희욱(喜煜) 4봉(封) 등이다.

당산제는 풍물패의 지신밟기로부터 시작된다. 풍물패는 마을을 3번 돈다. 초이튿날 밤 10시 정도에 마을을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돈 뒤, 마을 내에서 돌고, 앞 당산과 뒷산으로 이어지는 마을 가운데 길에서 지신밟기를 한 다음 12시가 넘어 뒷 당산으로 향한다.

뒷 당산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느티나무에 둘려 쌓인 곳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콘크리트 제단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뒷 당산은 양의 기운이라 하여 제물 음식을 익히지 않고 생것으로 모신다. 밥쌀, 떡쌀, 돼지 머리, 명태, 밤, 대추, 곶감, 미역, 미나리, 콩나물, 무 등을 준비하며 제를 지낸 후 돼지 머리는 이곳에 묻는다고 한다. 산신께 바치는 것이다. 제의 절차가 적힌 원강정 마을 당산제 홀기(笏記)가 있는데, 원강정 마을 홀기는 일반 사당에서 올리는 제의 절차와 같은 전형적인 유교식 제의 절차로 되어 있다.

[원강정 마을 당산제 홀기]

알자인초헌관입취위(謁者引初獻官入就位) 알자진헌관지좌근구청행사(謁者進獻官之左謹具請行事) 중관급학생개재배(衆官及學生皆再拜) 알자진초헌관예관세위(謁者進初獻官詣盥洗位) 북향립(北向立) 관수세수(盥手帨手) 인예신위전(引詣神位前) 북향궤(北向跪) 집사자일인봉향함일인봉향로(執事者一人奉香含一人奉香爐) 궤진(跪進) 삼상향(三上香) 집사자전노신위전(執事者尊爐于神位前) 축이폐비수초헌관집폐(祝以幣篚授初獻官執幣) 헌폐(獻幣) 이폐(以幣) 수축(授祝) 존우신위전(尊宇神位前) 집존자거멱작주(執尊者擧冪酌酒) 집사자이작수주(執事者以爵水酒) 執事者以爵授初獻官(집사자이작수초헌관) 집작(執爵) 헌작(獻爵) 이작수집사자(以爵授執事者) 존우신위전(尊于神位前) 축진신위지우(祝進神位之右) 동향궤(東向跪) 독축문(讀祝文) 부복흥(俯伏興) 평신(平身) 인강복위(引降復位) 알자인아헌관(謁者引亞獻官) 예관세위(詣盥洗位) 북향립(北向立) 관우세우(盥于帨于) 인예신위전(引詣神位前) 북향궤(北向跪) 집존자거멱작주(執尊者擧冪酌酒) 집사자이작수주(執事者以爵受酒) 집사자이작수아헌관(執事者以爵授亞獻官) 집작(執爵) 헌작(獻爵) 이작(以爵) 수집사자(授執事者) 존우신위전(尊于神位前) 부복흥(俯伏興) 평신인강복위(平身引降復位) 알지인종헌관(謁者引終獻官) 예관세위(詣盥洗位) 북향립(北向立) 관수세수(盥手帨手) 인예신위전(引詣神位前) 북향궤(北向跪) 집존자거멱작주(執尊者擧冪酌酒) 집사자이작수주(執事者以爵授酒) 집사자이작수종헌관(執事者以爵授終獻官) 집작(執爵) 헌작(獻爵) 이작수집사자(以爵授執事者) 존우신위전(尊于神位前) 부복흥(俯伏興) 평신(平身) 인강복위(引降復位) 중관급학생개재배(衆官及學生皆再拜) 집사자이작복주(執事者以爵福酒) 집사자진감신위전조육(執事者進減神位前胙肉) 알자인초헌관예음복위(謁者引初獻官詣飮福位) 서향궤(西向跪) 집사자이작수초헌관(執事者以爵授初獻官) 수작(受爵) 음졸작(飮卒酌) 집사자수허작(執事者受虛爵) 부치어점(復置於坫) 축이조수헌관(祝以胙授獻官) 헌관수조(獻官受胙) 이조수축(以胙授祝) 부복흥(俯伏興) 평신(平身) 인강복위(引降復位) 중관급학생개재배(衆官及學生皆再拜) 알자인초헌예음복위(謁者引初獻詣飮復位) 서향궤(西向跪) 집사자이작수초헌관(執事者以爵授初獻官) 수작(受爵) 음졸작(飮卒酌) 집사자수허작(執事者受虛爵) 부치어점(復置於坫) 축이조수헌관(祝以胙授獻官) 헌관수조(獻官受胙) 이조수축(以胙授祝) 부복흥(俯伏興) 평신(平身) 인강복위(引降復位) 중관급학생개재배(衆官及學生皆再拜) 알자인초헌관예망요위(謁者引初獻官詣望燎位) 요(燎) 중관급학생이차출(衆官及學生以次出)

[원강정 마을 당산 축문]

원강정 마을 당산제 축문은 뒷 당산과 앞 당산 축문이 각각 있으며 축문을 읽으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 뒷 당산 축문은 사시사철 태평하고 곡식이 번창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내용이며, 앞 당산 축문은 오방신에게 기원하는 내용이다.

뒷 당산에서 제를 마친 후 수령이 500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에서 제를 지내는데 이곳은 앞 당산이라 부른다. 앞 당산에서는 음식을 익혀 모시는데, 명태 5마리와 밥 5그릇을 준비하여 오방신에게 올린다. 당산인 느티나무는 임진왜란 때 마을을 형성하게 했던 오현과 관련된 나무로 이 나무에서 몸을 피해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앞 당산에서 제를 끝내면 새벽 3시쯤 된다.

날이 밝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 총회를 한다. 여기에서 그 동안의 경과보고와 한 해의 여러 일들을 논의한다. 그런데 요사이는 12월 말쯤에 이장을 선출하는 모임이 있어 간단히 한다. 이때 논의된 내용을 정리한 마을 회의록이 지금도 잘 보관되고 있는데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을 듯하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당산제 관련 기록도 1967년에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다.

1. 뒷 당산 축문

유세차 모년 모월 모삭 모일 모관 감소고우(維歲次 某年 某月 某朔 某日 某官 敢昭告于)/ 당산지신 광대유악 존아일동 복유 존영 음극서중 사시가고 동락태평(堂山之神 廣大維嶽 尊我一同 伏惟 尊靈 陰隙庶衆 四時歌鼓 同樂泰平)/ 백재소유 만상내정 실뢰보우 육축번식오곡풍양 근이 생폐례제지천우신(百災消遺 萬祥來呈 實賴神佑 六畜繁殖五穀豊穰 勤以 牲幣醴齊祗薦于神)/ 상향(尙饗)

2. 앞 당산 축문

유세차 모년 모월 모삭 모일 감치제우(維歲次 某年 某月 某朔 某日 某致祭于)/ 동방려혼지신(東方厲鬼之神)/ 서방려혼지신(西方厲鬼之神)/ 남방려혼지신(南方厲鬼之神)/ 북방려혼지신(北方厲鬼之神)/ 중앙려혼지신(中央厲鬼之神)/ 성상 어 이매잠적 혼유인현 무상침독 유원중신 청아리사 근이주과 지천우신기래음(聖上 御 魑魅潛跡 鬼幽人顯 無想侵瀆 惟願衆神 淸我里社 謹所酒果 祗薦于神其來歆)

[원강정 마을 농경 문화의 상징 들돌과 용대기]

원강정 마을 입구 앞 당산 나무 아래에는 160근 정도의 들돌이 있다. 들독, 거석, 등돌, 든돌, 당산돌이라고도 불린다. 들돌은 제물을 음복 후에 신의(神意)를 알아보기 위해 이 들돌을 들었다고 한다. 또한 정월 대보름, 유월 유두, 칠월 칠석, 백중, 추석 등 명절에 아이들이 성년이 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원강정 마을 들돌은 백중날 술맥이 때 사용된 것으로 힘자랑을 하던 민속 신앙물이다.

원강정 마을에는 18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용대기실명기, 그리고 50년 전에 제작된 농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용대기 깃발에는 “창시 도광 십오년 삼월 일 갑자 칠월 일 수보 전북 진안 마령 강정리 용대기(創始 道光 十五年 三月 日 甲子 七月 日 修補 全北 鎭安 馬靈 江亭里 龍大旗)”라 기록되어 있어 1835년에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용대기에는 중앙에 용, 좌측 상단에 거북, 우측 상단에 잉어가 그려져 있다. 용대기는 농경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한 기우제와 만두레 때 사용되었다.

만두레 때는 마을 앞에 용대기를 내걸어 마을에 두레가 났음을 주위에 알렸으며 기우제를 지낼 때 내동산에 직접 용대기를 가지고가서 세운 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실명기도 용대기와 같은 연대에 제작되었으며 두레 날에 영기와 함께 일하는 논에 가지고 가서 꽂아 놓으며, 농악놀이 할 때는 실명기로 기 놀이를 펼친다. 농기는 1963년 마령면 체육 대회에서 농악 부분 1등을 수상하여 받은 것인데 여기에는 중앙에 “농사(農事)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용대기를 세운 깃대가 현재도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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