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지도』 「진안·용담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894
한자 全羅道地圖鎭安龍潭縣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전라도지도』 「진안·용담현」 간행
소장처 서울 대학교 규장각 -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림길 99-15[신림동 103-331]
성격 고지도[행정·군사용]

[정의]

1872년에 흥선 대원군이 주도 하여 편찬한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고지도.

[개설]

18세기 조선 사회는 각종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농업 부문의 생산력이 높아졌으며, 상품 유통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실학은 물론 문학과 예술 부분에서도 많은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세도 정치와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정치는 물론 민생까지도 혼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세도 정치를 일소하고 당쟁을 타파하였으며, 군사 제도를 정비하고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개혁을 위한 기초 자료 확보를 위해 전국의 상세한 지리 정보를 구축하려 하였다. 1871년에는 전국적 읍지(邑誌)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고, 이듬해 1872년에는 전국 각지의 지도 제작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총 459매의 도엽이 완성되었고, 그 안에는 군현(郡縣) 지도뿐만 아니라 영(營)·진보(鎭堡)·목장(牧場)·산성(山城)·봉수(烽燧) 등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

『전라도지도』는 총 84도엽으로 그 안에 「진안·용담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제작된 지도 중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지도이다.

[편찬/간행 경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외세의 침입을 방비하고 국가 내부적인 개혁을 위한 기초 자료 구축을 위해 지도가 제작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주도하에 1872년 전국 각 군현에서 제작하고 중앙에서 수합하여 459매의 지방 지도로 만들어냈다. 『전라도지도』「진안·용담현」 지도도 중앙의 명령에 따라 제작되어 보내진 것이다.

[형태/서지]

『전라도지도』는 각 장마다 크기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세로 35㎝, 가로 25㎝로 채색 필사본 지도이다. 총 8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주 삼읍 지도(濟州三邑誌圖)」에는 대정(大靜)·정의(旌義) 지도가 첨부되어 1첩 3장이며, 남도진(南桃鎭)은 진지(鎭誌)와 지도 2장이고 나머지는 한 지역에 1장씩이다. 지도의 표지 제명에는 전라 우도, 전라 좌도, 전라도 등 도(道)가 표시되었다.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용담현진안현에 대한 상세한 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

[구성/내용]

『전라도지도』 「진안·용담현」 지도는 19세기 후반 전라도 진안현용담현 일대의 모습을 그린 채색 필사본 군현 지도이다. 진안현은 지금의 진안군 진안읍·상전면·부귀면·마령면·성수면·백운면에 해당하고 읍치는 진안읍 군상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과 금남 정맥 사이의 고지대에 위치한 산간 고을로 북쪽은 금강 수계, 남쪽은 섬진강 수계에 해당한다. 용담현은 지금의 진안군 용담면·주천면·동향면·안천면·정천면 일대에 해당하고, 읍치는 용담면 옥거리에 있었다. 이 지역은 평지가 적은 산간 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회화식 산수화 기법을 활용하여 지도가 제작되었다.

진안현은 중앙에 동헌·객사·향교 등 주요 시설이 위치하고 있고, 읍치를 중심으로 13개의 면과 12개의 창(倉)이 동서남북으로 위치해 있다. 사창 제도는 1451년(문종 1)부터 실시되었으나 중간에 존폐를 거듭하다가 정조 대에 사창의 부활이 시도되었다가 흥선 대원군 때는 농민 항쟁의 대응책으로 다시 사창제가 제기되어 1866년(고종 3) 사창절목을 마련하고 사환제(社還制)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그동안 지도에서 보이지 않던 사창이 지역마다 자세히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산천으로는 격양산·부귀산·마이산·선각산·성수산 등이 현을 둘러싸고 있고, 금강으로 합류하는 진안천이 산을 감싸고 흐르는 형국으로 묘사되어 있다. 주위 교통로로는 전주로 넘어가는 마치와 웅치가 있고, 고산으로 넘어가는 소대치, 용담으로 넘어가는 산영치, 장수로 넘어가는 율치, 장수로 넘어가는 석우치, 임실로 넘어가는 대웅치와 금당치 등이 있다. 시장은 읍치 앞을 흐르는 진안천 남쪽으로 읍 장시와 서쪽에 마이산을 지나 임실로 가는 길목에 외장시가 표기되어 있다. 그 외에도 사직단, 사찰, 암자, 연못, 교량, 도로, 하천 등에 대한 지리 정보도 수록하고 있다.

용담현은 중앙 읍내면에 동헌과 객사 향교가 위치해 있고, 동헌 앞과 교성천 사이 대로변에 장시(場市)가 표시되어 있다. 북쪽에는 옥류동 계곡이, 남쪽은 주줄산이, 동쪽은 동창, 서쪽은 이서면 반일암을 경계로 하고 있다. 관내에 7개의 창(倉)이 있으며, 북으로 가면 금산에, 동북으로 가면 무주에, 동남으로 가면 장수에, 남으로 가면 진안에, 서남으로 가면 고산에 갈수 있으나 서쪽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동서남북 행정 구역과 마을 이름이 표기되어 있고, 사찰·정자·교량·도로·하천 등에 대한 지리 정보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하단에 이 지역에는 봉대(烽臺) 관방(關防) 포구(浦口) 조수(潮水) 진보(鎭堡)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지리 정보가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은 흥선 대원군의 공이 크다. 진안과 용담 등 전국 459개 군현의 지도 제작을 명했던 흥선 대원군은 1863년 즉위하여 1864년 서원 정리를 시작하고 1865년에는 경복궁 중건을 시작하였으며,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국방과 통치에 대한 기본 토대로 지금까지의 지도보다 더 정밀한 지도를 만들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더욱 많은 지명과 행정구역에 대한 정보가 수록된 지도가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지도들은 조선 후기 지방 통치의 근간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도의 고지도 중 진안현용담현 지도는 조선 시대 제작된 지도 중 두 지역에 대한 가장 많은 지리 정보와 인문 정보를 담고 있다. 따라서 중앙 정부에서 진안현용담현에 대한 행정과 군사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도였으며, 조선 후기 진안 지역의 모습을 연구하는 기본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정밀한 지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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