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686
한자 婚禮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례

[정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혼인과 관련하여 행해지는 일련의 의례.

[개설]

혼례란 두 남녀가 결합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의식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최초의 절차인 혼례는 남녀 두 사람의 사회적·경제적인 결합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혼례를 인륜의 대사(大事)라고 하여 중요시했는데, 이는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이룬다는 지위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두 가문(家門)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혼례의 가장 큰 특징은 전국적으로 비교적 통일된 방식에 따라 행해진다는 데 있으며, 거의 지역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전통 혼례는 주로 신부 집에서 행하였으나 형편에 따라 신랑 집에서 하는 경우도 있다.

[연원 및 변천]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는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전통 혼례 예법에 따라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의 육례(六禮)로 행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의혼(議婚), 납채, 납폐(納幣), 친영의 사례(四禮)로 축약되어 행해지다가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은 신식 결혼식이 등장하면서 전통 혼례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는 대부분 결혼식장에서 서양식 결혼을 하고, 예식 후 전통 혼례 복식으로 갈아입고 폐백을 드린다. 원래 폐백은 전통 혼례에서 대례 후에 행하던 의례로, 서양식 결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신부의 집으로 먼저 가서 휴식을 취한 다음, 신랑 집으로 가서 인사를 올리고 친척들을 찾아 인사를 드린다. 이 역시 전통 혼례의 절차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이다.

[절차]

1950~1960년대에는 중매인을 통해서 의혼(議婚)했다. 이들은 전문적인 중매인이라기보다는 혼주의 친구나 친척이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전에는 당사자끼리 선도 보지 않고 궁합이 맞으면 결혼을 결정했는데, 혼인 조건은 대개 집안을 따져 보고 궁합이 좋으면 양가의 어른들이 합의하여 정한다.

중매인이 사주와 궁합을 보고 이상이 없어 양가가 합의하면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사성(四星)[남자의 생년·월·일·시]을 보낸다. 이때 여자 측에서 혼사가 마음에 들면 신부의 사성을 보내고, 정식으로 결혼 날짜를 잡는다. 이를 납채(納采)라고 한다. 날이 정해지면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으로 함을 보내는데 이를 납폐(納幣)라 한다. 함은 혼례 당일 신랑과 함께 신부 집으로 들어가거나 그 전날 들어가기도 한다.

전통적인 혼례는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향하는 것을 초행(初行)이라고 한다, 혼례식의 본격적인 절차는 전안례(奠雁禮)인데 이는 혼례 당일 신랑이 신부 측에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드리는 의식이다. 교배례(交拜禮)는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만나서 서로 맞절을 하는 절차이며 진행자의 구령에 맞추어 순서대로 예를 올린다. 신랑은 동쪽에, 신부는 서쪽에 서서 신부가 먼저 절을 하고 신랑은 이에 답배를 한다. 그리고 절을 끝나면 신랑과 신부가 마주 앉아 각각 술 한 잔을 마시고 이어서 잔을 바꾸어 한 잔을 마시는데 이를 합근례(合巹禮)라고 한다. 이때 신랑은 술을 마시지만 신부는 대부분 입에 댄다고만 한다. 대례가 끝나면 신부는 방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서 신랑을 기다린다.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맞이하는 것을 초야(初夜)라 한다. 첫날밤에 눈이 많이 오면 잘 산다고 한다. 혼례를 치른 후 하룻밤 혹은 사흘 밤을 친정에서 지내고 시댁으로 가는데 이를 신행(新行)이라 한다. 신부가 시집을 와 시부모와 친지들에게 잔을 올리고 절을 하며 예를 올리는 것을 현구 고례(見舅姑禮)라 한다. 시집을 간 후 다시 친정을 찾는 것을 근친(覲親)이라 한다. 근친을 가는 날은 결혼 후 사흘 만에 가기도 하고 1년이 지나서 가기도 한다. 진안 지역에서는 대부분 시집을 온 후 1년 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친정을 가며, 친정을 갈 때는 술과 떡을 장만하여 간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예전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혼례에 사용하는 사모관대, 족두리, 나무 기러기, 함, 가마 등을 비치해 두고 빌려 쓸 수 있었다. 마을마다 경제 규모가 달라서 혼례용품이 비치되지 않은 마을은 다른 마을에서 빌려 오기도 하였다. 한편 혼례와 관련된 계도 있어 정기적으로 쌀을 거두었다가 자녀의 혼사가 있으면 계를 타서 떡도 하고 돼지도 잡는 등 비용을 충당하였다. 예전에는 혼례식의 부조를 돈으로 하지 않고 계란 한 줄, 국수 한 묶음 등의 음식으로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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