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생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573
한자 衣生活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진명숙

[정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착용해 온 의복 및 이와 관련한 생활 풍속,

[개설]

진안 지역의 의생활은 지리·기후·지형과 같은 지역의 해당 자연 환경과 경제·사회·문화적 조건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지역적 차이가 크다. 기성품의 옷감이나 의복이 들어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진안 지역 농촌 주민들은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다. 옷감은 대마[삼], 목화 등을 재배하거나 누에를 쳐서 얻었다.

1980년 발행된 『한국 민속 종합 조사 보고서』 전라북도 편에 실린 진안군 직조 수공업 내용을 보면 삼베, 무명, 모시, 명주 등을 만들기 위해 파종에서부터 수확 후 베틀에 실을 짜기까지 수고로운 공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각 농가마다 베틀을 잘 보관하여 사용할 만큼 개화기 기성복이 도입되기 전에 대부분 서민들은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현대에 와서는 대부분의 의복은 공장에서 생산된 옷을 구입해서 착용하기 때문에 의복의 형태가 비슷하며, 지역에 따른 차이도 거의 없다.

[평상복]

개화기 이전까지 남자 평상복의 기본 구조는 바지에 저고리였다. 저고리는 천으로 만든 허리띠에 옷고름 또는 단추를 1개 달았다. 상의에는 두루마기·마고자·조끼·저고리·적삼·등걸이·토시 등이 있고, 하의에는 속고의·고의·바지·대님·행전 등이 있다. 요식에는 허리띠와 주머니가 있고, 이식에는 버선과 신이 있다.

여성의 경우 저고리와 치마가 기본 구조였다. 1900년대 들어서 저고리 소매통이 매우 좁고 길이도 짧아져 가슴을 감는 허리띠가 필요했다. 여성 복식의 최대 변화는 활동하기에 편리한 검은색의 짧은 통지마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양 속옷이 들어오면서 한복 속옷은 차차 감취를 감추게 되었다. 대신 속치마는 개화기 때 도입되었다.

여름철 옷감은 오직 삼베였다. 봄철 논밭에 삼을 재배하여 여름부터 겨울 내내 밤을 세워가며 삼베를 짜 옷감을 만들었다. 겨울 옷감은 목화 재배를 하여 짠 무명베를 사용했다. 무명베는 단풍나무과인 ‘신나무’를 삶은 검정 물을 들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여름철 삼베는 시원하고, 겨울철 무명베는 따뜻하며, 누에고치의 명주 베는 부드럽고 보온력도 뛰어났다.

명주는 고급 천으로 목화솜을 넣어 입으면 무거워 다소 활동이 부자연스러우나 따뜻했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고급 천인 모시옷에 풀을 먹여 품위 있게 옷을 지어 입었고 외국에서 온 고급 천과 비단을 이용한 옷을 입기도 했다. 일반 가정에서는 주로 공장에서 나오는 광목을 이용하여 옷을 지어 입었고 노인들은 외출 시에 갓을 쓰고, 집에 있을 때는 갓 속의 망건만을 쓰기도 하였다. 겨울철 맹추위 속에서도 속내의는 입지 않았고 무명베 옷에 목화솜을 넣어 솜옷을 지어 입었다.

신발은 주로 짚신을 신었다. 겨울철에 사랑방이나 안방에서 일 년 동안 신을 짚신을 삼아 놓는다. 양말은 거의 신지 않았고 버선이 있었으나 부유층에서나 처녀들이 뜨개질로 속내의나 양말, 장갑을 사치품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시대부터 일본인의 영향으로 나막신이 보급되었고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고무신이 나왔다.

조선 후기 서양의 신문물의 도입, 일제 강점기, 갑오개혁 등 개화기 시대에 수천 년간 입어오던 한복이 양복으로 바뀌는 등 의생활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반 서민의 복식은 관복, 군복, 개화 인사들의 복식처럼 빨리 서양화되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양복과 양장을 평상복으로 하며, 주로 기성복을 이용한다.

[의례복]

1. 출생 의례복

출생 의례복은 출생 직후부터 삼칠일, 백일, 돌을 거치는 동안에 입는 의복이다. 삼칠일 옷은 출생 후 3일부터 21일 동안 입히는 옷이다. 주로 백일 때까지 입는다. 백일 옷은 백색 옷감에 백줄을 넣어 만든 누비옷이다. 이렇게 하면 100살까지 산다고 한다. 돌복은 아이가 태어난 지 1년째 되는 돌날에 입는 옷을 말한다. 남아는 연보라 풍차바지에 옥색 또는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남색 돌띠를 맨다. 개화기 이후에는 그 위에 남색 조끼와 연두색 길에 색동 소매를 단 마고자를 덧입었다. 여자아이는 분홍색 풍차바지에 노란색 속치마를 입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저고리는 색동 소매를 단 노랑이나 연두색 길의 저고리였다. 오늘날에는 별도로 삼칠일, 백일 등을 따져 의례복을 입히지는 않지만, 돌복은 여전히 전통 한복을 고수하고 있다. 요즈음은 연회장에 비치된 다양한 돌 한복을 골라 입거나 전문 한복점에서 빌려 입는다.

2. 혼례복

신랑은 자색이나 남색 관복을 입고 각띠를 띠고 흉배를 달았는데 이 흉배는 당상관과 같은 쌍학의 흉배를 달았다. 그 속에 청색의 도포를 입었다. 신부는 활옷과 원삼을 입었다. 활옷 속에 다홍색 치마와 노란색 삼회장 저고리를 입었다. 오늘날에는 대개 서양식의 웨딩드레스와 양복을 입는 결혼식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까지 진안의 옛 사진 자료를 보면 전통 혼례복을 입고 전통 방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풍습이 잔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상서 마을 황계주, 박명자 씨의 결혼사진이나, 동창리 화산 마을에서 치러진 결혼사진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3. 수의

염습할 때 송장에 입히는 수의(壽衣)는 윤달에 많이 만드는데, 윤달은 공달[空月]이라 하여 이때는 궂은 일을 해도 전혀 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의는 예전에는 베를 짜서 손수 만들었다. 근래에는 마을 회관 등에서 수의를 파는 사람에게 구입해서 장만하거나, 상조 회사, 장례식장 등에서 제공하는 수의를 활용하기도 한다.

4. 상례복

남자 상주는 굴건제복(屈巾祭服), 여자는 삼베 치마에 광목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는 게 통상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1969년 ‘가정 의례 준칙’ 등을 거치면서 많이 변화되고 간소화되었다. 서구의 영향으로 남자의 경우 검정색 양복과 검정색 넥타이에 베로 만든 건(巾) 또는 완장·행전을 하며 때로는 완장 하나로 상제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자는 검정색 치마·저고리를 입거나 검정색 양장을 하며, 머리에는 흰 리본을 단다.

[길쌈]

길쌈놀이는 부녀자들이 음력 7월부터 8월 추석에 이르는 동안 공동으로 길쌈을 하면서 혹은 끝낸 다음에 옛날이야기 등의 담소를 나누거나, 가무를 즐기거나, 또는 편을 갈라 승부를 내며 놀았던 풍습이다. 특히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남지방에서는 대개 음력 7월부터 8월 추석에 걸쳐 온 마을의 부녀자들이 두레와 같은 공동체를 조직하고 길쌈을 하였다. 1992년에 편찬된 『진안 군사』에 실린 베틀가는 다음과 같다.

베틀을 놓네/베틀을 놓네/울안에다 베틀을 놓네/이 베를 짜서 뉘를 주랴/바지질 끈에 눈물이로구나/주야장장(晝夜長長) 베만 짜고/어느 새에 시집을 가냐/춘포조포 생왕포요 경상도 안동포(安東布)라/낮에 짜면 일광(日光)단이요/밤에 짜면 월광(月光)단이라/늙은이가 짜면 노방추요/젊은이가 짜면 차부단이라/일광(日光)단 월광(月光)단 다 짜고서/어느 새에 시집을 가나/닭아 닭아 울지 마라/잉에 짜기가 다 늦어간다/에헤야 베 짜는 아가씨/사랑 노래 베틀에 수심에 차누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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