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547
한자 盧村里愼鏞權所藏古文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원노촌 마을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지도보기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신의련
용도 상서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원노촌에 거주하는 신용권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개설]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원노촌에 거주하는 거창 신씨 신용권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로서 원노촌의 거창 신씨 미계 신의련의 사당 건립을 추천하는 상서류이다.

[제작 발급 경위]

원노촌은 대대로 거창 신씨의 세거지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신의련의 효행은 일본인 왜장을 감동시켰다. 이에 왜장은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라고 마을 입구에 써서 이곳에서 노략질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원노촌 마을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무사했다고 하는 오만동 전설까지 등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미계 신의련에 대한 포장이 이루어졌으나, 사당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를 안타까워했던 이 지역 유림들은 마침 암행어사가 왔을 때 신의련을 모시는 사당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남원, 전주, 임실, 용담, 운봉, 장수, 진안 등 약 115명 정도가 연명한 것이다.

신용권 소장 상서는 1854년[갑인년]에 작성된 것 4매, 1855년[을묘년]에 작성된 것 2매, 1856년[병진년]에 작성된 것 1매로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모두 고을의 유림이 각각 안렴사, 전라 감영 등지에 올린 상서류와 향교에 돌린 통문류이다. 1854년에 암행어사에게 올린 상서의 경우는 유생 진사 노석승(盧錫昇), 윤행기(尹行騏), 최규화(崔奎華) 등의 소두로 작성된 것으로 남원 유림, 37명, 전주 17명, 임실 18명, 용담 12명, 운봉 8명, 장수 10명, 진안 13명 등 총 115명이 연명하였다. 이후 충효사가 1856년에 세워졌으니 모두 충효사 건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형태]

상서는 조선 시대 민원서인 소지류에 해당한다. 소지류와는 약간 다르지만 연명하여 올리는 것은 등장(等狀)과 같다. 제목, 내용, 연명자, 제사로 구성되는데, 제목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상서의 주체와 문서의 성격을 나타내며, 내용은 문서의 핵심으로 산송, 효행, 탁행의 정려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연명자를 드러냄으로써 이것이 유림의 공론임을 드러내게 된다. 마지막으로 상서를 접한 관찰사나 수령의 검토 후에 그 처분 내용, 즉 제사로 이루어져 있다.

신용권 소장 고문서는 모두 7매로 크기는 각각 109.2×59.2㎝[1854], 107.4×57.8㎝[1856], 109.5×59㎝[1854], 108.7×57.8㎝[1855], 114.6×59㎝[1855], 107.2×58.7㎝[1854], 108.2×58.6㎝[1854]이다.

[구성/내용]

상서 및 통문의 내용은 산송과 효행, 탁행의 정려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상서를 접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이라고 하는데 그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신용권이 소장하고 있는 상서류와 통문류는 모두 진안현(鎭安縣)미계당(美溪堂) 신의련(慎義連)의 사당을 건립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고문서에 의하면 신의련은 ‘임진란 당시 왜인들과 마주쳤을 때 병든 아버지를 해치려 하자 죽음을 불사하면서 막아섰고, 아버지를 해치지 말도록 애걸하였다. 왜인이 이를 어여삐 여겼는데, 종이에 ‘효자 신의련’을 써서 불에 태우니 종이는 불에 타버렸으나 5자의 글씨는 타지 않고 날아가 버리자 드디어 ‘진실한 효자’라 하여 왜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같이 피난했던 고을 사람들이 무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이미 효자로서 정려를 받았으나 아직 사당을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당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다.

[의의와 평가]

신용권 소장 고문서는 상서류로서 거창 신씨 재각인 충효사의 건립과 관련된 서류로서 당시 사당 건립을 위한 이 지역 유림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문서이며, 그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