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059
한자 金重鼎
이칭/별칭 자삼(子三),긍구당(肯構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2년연표보기 - 김중정 출생
추모 시기/일시 1624년 - 김중정 주천 서원에 배향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김중정 관직에서 은퇴, 충청남도 연산으로 낙향
활동 시기/일시 1637년 - 김중정 진안군 주천면으로 이거
활동 시기/일시 1654년 - 김중정 와룡암 건립
활동 시기/일시 1700년연표보기 - 김중정 사망
출생지 김중정 출생지 - 서울 황화방
수학|강학지 김중정 강학지 -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산 8 와룡암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중정 묘소 -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호계리 대방동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주천 서원 -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지도보기
묘비 김중정 묘비 -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밤골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산(光山)
대표 관직|경력 첨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 진안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병자호란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고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삼(子三), 호는 긍구당(肯構堂). 양간공파에 공안공(恭安公) 김겸광(金謙光)의 후손으로 감찰공파 27세손이다. 할아버지는 매곡(梅谷) 김충립(金忠立)이다.

[활동 사항]

김중정(金重鼎)[1602~1700]의 서울 황화방(皇華坊)에서 태어났다. 1636년(인조 14)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있었으나,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남한산성에서 치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친명파의 한사람으로 사림에 묻힐 것을 각오하고 조부인 김충립과 함께 낙향하였다.

한때 충청남도 연산에 머물다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1637년에 진안군 용담의 주자천 변으로 이주하였다. 주양리는 일찌기 주잠이 잠시 살다 간 곳으로 주위의 산천 이름이 명덕봉, 명도봉, 화산봉, 주자천 등 명나라를 동경할 수 있는 지명이었으며 산수도 수려하여 여기에 애착을 느껴 ‘쌍고도덕 대명일월(雙高道德大明日月)’이라 자위하며 정착하였다. 또한 용담은 할아버지인 김충립이 이전에 은거지로 잡아 놓은 곳이었다고 한다. 1654년(효종 5)에 강당을 짓고 ‘와룡암(臥龍庵)’이라 편액한 후 낙향한 한을 시와 거문고로 달래고, 자제를 가르치면서 만년을 보냈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긍구당 유고(肯構堂遺稿)』가 있다. 『긍구당 유고』는 김상현(金尙鉉)의 서와 9대손 김태현(金泰鉉)의 발을 붙여 목활자본 1책으로 1899년에 간행되었다.

[묘소]

묘는 진안군 용담면 호계리 대방동에 있으며, 대사헌 박성양이 비문을 쓴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24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에 있는 주천 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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