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006
한자 黃大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지 황대성 출생지 -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조선 후기 진안 출신 의병장

[개설]

임진왜란 때 수백 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병과 싸웠던 의병장이다.

[가계]

부인은 옥천 육씨이다.

[활동 사항]

황대성(黃大成)[?~?]은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수 백 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병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황간(黃澗)에서 체포되어 일본에 포로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그의 충의와 행동에 감복한 일본인 옥리(獄吏)의 주선으로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선조실록』에는 1600년(선조 33) 4월 13일에 경상도 수군절도사 유형(柳珩)이 “3월 18일에 작은 배[小船] 1척이 먼 바다에서 들어오기에 포를 쏴서 잡고 보니, 그 배엔 살아 돌아오는 우리나라의 남녀 30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거제(巨濟)의 교생(校生) 옥신변(玉信辨)과 용담(龍潭)의 교생 황대성(黃大成)의 말을 들어보니, 수길(秀吉)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이 13세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한 명의 왜추(倭酋)가 섭정(攝政)하고 있는데, 여러 곳의 왜장(倭將)들이 왜도(倭都)에 모여 서로 공격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기세는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한 장계로 보면, 일본에서의 경험은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일조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부인 옥천 육씨가 순절한 것을 알고는 뒤따라 자결했다.

부인인 옥천 육씨는 남편이 의병을 이끌고 싸우러 나간 뒤에 몸종 천분(千分)과 같이 난을 피하여 상배실 앞 구례말 남쪽 산 불공 터에 움막을 짓고 숨었으나 왜군에게 붙들려 욕을 당하게 되자 둘이 함께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옥천 육씨의 정려는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백화리 중배실 어귀 화산 서원 앞 도로변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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