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32
한자 民間人虐殺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정의]

6·25 전쟁 전후에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6·25 전쟁 중 좌·우의 이념 대립이 원인이 되어 군경과 북한군에 의해 민간인이 입은 피해로, 전쟁 초기 북한군의 점령 및 1950년 9월 이후 진안 지역을 수복한 군경의 공비 토벌 작전으로 피해가 커졌다.

[경과]

1950년 9월 28일 미 제24사단 38연대가 북한군을 퇴각시키고 진안 지역을 수복했다. 북한군은 9월 20일에 퇴각하면서 유치장에 감금했던 우익 인사 38명을 진안읍 군하리에서 처형했다고 알려졌으나 그 명단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그보다 앞서 7월 20일에 진안 지역에서 경찰이 퇴각하기 직전 예비 검속자 30여 명을 백운면 신암리에서 처형한 사실도 알려져 있다.

1950년 10월에는 인민 위원회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양재춘 등 5명의 부귀면 정곡리 주민들이 국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들은 장승 지서를 거쳐 진안 경찰서로 이송된 후 장소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수백 명과 함께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함께 희생된 주민들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1950년 10월 말부터 경찰 토벌대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하면서 주민들의 피해가 급증하였다. 10월 23일 진안 경찰서 토벌대가 성수면 좌포리에 진입하자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신했다. 경찰이 이들을 쫓아가 사살했는데, 당시 희생된 주민들은 7~8명이었다고 한다.

백운면에서도 수복 이후 좌익 토벌 과정에서 마을이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 공화국’이 되는 경험을 하였고,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는 사례도 있었다. 1951년 10월 4일에는 빨치산들이 백운면 지서를 습격했고, 1951년 3월 16일 신암리 대전 마을에서는 마을 구장의 가족 3명을 빨치산들이 끌고 가서 살해하였다. 토벌대가 대전 마을을 수색하다 빨치산들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대전 마을은 빨치산의 은신처로 지목되어 전소되고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마을을 잃은 주민들은 한동안 반송리에서 피난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

6·25 전쟁 중은 물론 휴전 협정 이후에도 공비 토벌이 진행되면서 민간인 피해가 커졌다. 진안 지역에서 정규군이 직접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북한군의 점령과 군경의 토벌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진안 지역은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비교적 크지 않았으므로 다른 지역에 비해 민간인 피해가 크지 않았고 지역 사회의 이념 대립도 큰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 마무리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