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 웅치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009
한자 湖南-熊峙戰鬪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태규

[개설]

웅치 전투는 1592년 7월 8일을 전후로 하여 전라도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오는 고개인 웅치에서 전주 부성을 공격하고자 하는 왜군을 호남 지역의 관군과 의병이 사투를 전개하여 왜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안덕원까지 진출하였던 왜군을 격퇴하여 호남을 지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전투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전라도의 역할이었다. 무엇보다도 임진왜란 시기 동안 전라도 지역으로부터 병력과 물자가 계속 조달 공급되어 조선이 장기 항전을 통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진주성 제2차 전투가 끝난 직후인 1593년 7월 16일에 이순신(李舜臣)은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남은 국가의 보장이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곧 국가도 없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말을 남겼다. 이순신의 이 말은 임진왜란 극복 과정에서 호남이 보여준 결정적 역할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호남의 역할이 가능하였던 것은 호남이 지켜졌기 때문이었고, 호남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웅치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군의 호남 침공]

임진왜란 발발 초기 왜군은 부산으로부터 조선의 수도 한양을 향하여 공격하였기 때문에 전라도는 왜군의 공격 목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한양이 점령된 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전라도 또한 왜군의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선조 임금을 쫓아 북상을 계속하던 왜적이 육군이 5월 말부터 전라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장수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군수 물자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소모전을 지양하고 분할 지배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점령 지역을 각 장수에게 할당하여 직접 조세를 거두며 지배하도록 하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지역은 장수를 배정하여 점령 지배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도 또한 왜군의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남해에서 이미 이순신의 활동이 시작됨으로써 왜군의 수군은 전라도로 직접 공격해 진격해 오지 못하고 있었고, 왜군의 육군이 한양과 부산으로부터 육로를 통하여 전라도로 공격하여 오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라도에 침입하려는 왜 육군의 주장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로 처음에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등과 같이 바다를 건너와 그 군사를 성주·선산·김산 등 여러 곳에 주둔케 한 다음 한성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로 하여금 별군을 지휘하고 전라도로 침략하도록 하였다.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안코쿠지 에케이는 전라 감사를 자칭하면서 남원을 거쳐 전주로 올라가려고 작정하고 의령으로 향하다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군사에 의해서 그 진로를 저지당하였고, 다시 현풍에서 거창으로 공격해 들어오다가 의병장 김면(金沔)에 의하여 타격을 입고 성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으로부터 호남 지역으로 공격해 오는 왜군을 차단하는 데에는 곽재우김면 등 경상우도 지역의 의병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한성을 떠나서 청주를 지나 남하한 다음 군사를 모아 전라도로 쳐들어가기로 하고 일로는 지례와 거창을 치고 또 일로는 황간과 순양을 거쳐서 전라도로 향하였다. 이것이 6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이에 조선군 측에서는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榮)은 금산에, 이계정(李繼鄭)은 육십령에, 장의현(張義賢)은 부항[현 김천시 부항면]에, 김종례(金宗禮)는 동을거지[위치 미상]에 진을 치고 방어하였다. 그러나 6월 19일경 지례로부터 무주로 왜적이 침범해 들어오고 마침내 6월 23일 금산으로 쳐들어오니, 그곳을 지키던 군수 권종(權悰)은 적을 막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금산을 지키던 방어사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으로 퇴각하여 금산이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금산에는 호남을 공격하려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군대가 들어오고, 곽재우에게 밀려 성주로 퇴각해 있던 안코쿠지 에케이 군대도 주둔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산의 왜군은 용담·진안을 친 다음 웅치를 넘어서 전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6월 말에는 이미 용담과 진안이 적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호남 또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전라도의 상황은 초기에 10만 근왕병이 용인 전투에 패퇴하여 전력을 크게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었고, 여기에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다시 북상함으로써 호남을 방어할 수 있는 병력이 현저히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호남의 제2차 근왕병이 출동한 뒤 호남 지역 선비들의 창의 활동이 전개되어,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을 중심으로 의병이 결성되고 있었다. 특히 8천의 호남 의병을 거느리고 전주를 떠나 서울로 북상하던 고경명은 왜군의 금산성 침공 소식을 듣고 진로를 바꾸어 7월 초 진산으로 이진하여 금산의 왜군을 견제하였다.

[웅치 전투의 전개와 전황]

6월 말 금산을 점령한 왜군이 진안을 점령하여 전주 부성이 위협을 느끼자, 전라 감사 이광(李洸)은 광주 목사 권율(權慄)을 도절제사를 삼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를 지키게 하는 한편, 방어사 곽영(郭嶸), 동복 현감 황진(黃進),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김제 군수 정담(鄭湛) 등으로 하여금 웅치와 이치(梨峙)의 관애(關隘)를 지키게 하였다.

이에 김제 군수 정담은 동복 현감 황진과 더불어 미리 웅치에서 지세와 적정을 살피는 한편 간첩 활동을 하고 있던 금산 월옹사(月瓮寺)의 중을 처형하고 목책을 세우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방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안에 들어온 왜군이 전주 부성을 점령하고자 웅치를 향해 공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웅치에는 김제 군수 정담, 나주 판관 이복남,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이끌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7월 2일 왜적이 용담으로부터 장수 방면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전라 감사 이광웅치를 지키고 있던 황진을 남원 경계로 옮겨 지키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웅치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 등이 남아 파수하게 되었는데, 그때 전 전주 만호 황박(黃樸)도 의병 200명을 모아 웅현에 가서 복병하여 조력하고 있었다.

7월 5일 진안으로부터 적병이 전주로 향하자 감사 이광은 남원으로 파견하였던 황진으로 하여금 다시 웅치로 돌아와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황진이 아직 남원으로부터 돌아오기 전인 7월 8일 새벽부터 진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은 웅치 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권율은 전라 감사 이광의 지시에 따라 남원에서 영남과 호남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고, 황진도 전라 감사의 명에 따라 남원으로부터 오는 도중에 있었으므로 실제로 웅치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 나주 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여기에 전라 감사 이광이 군사를 보내 응원하였다.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에 나가 지키고, 나주 판관 이복남은 제2선을, 그리고 김제 군수 정담은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하여 쳐들어오는 왜군을 막아 싸웠다. 이때의 상황이 『선조실록』이나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웅치에 침입한 왜적의 그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선봉 부대만도 수 천 명에 달하는 대부대였다. 선봉 부대의 공격에 대하여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싸워 물리쳤으나, 해가 뜬 뒤에 적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고 이날 오전오각(五戰五却)의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저녁 무렵 마침내는 힘이 다하여 화살이 떨어져 소란한 틈을 타서 왜군은 다시 전면 공격을 가해왔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복남과 황박 등은 후퇴하여 안덕원에 주둔하고, 웅치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 휘하의 장정들이 끝까지 사투를 전개하여 김제 군수 정담을 위시하여 종사관 이봉·강운 등 많이 장정들이 전사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는 해남 현감 변응정도 김제 군수 정담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호남 방어군의 용맹에 감동한 적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조상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웅치에서 아군과의 접전에서 가까스로 웅치를 넘은 왜적은 아군이 무너진 틈을 타서 7월 9일경 전주 부근으로 진출하여 왔다. 그러나 왜적은 전주 부성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안덕원 너머에서 아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웅치에서 큰 타격을 입고 주력 부대가 무너짐으로써 전력이 상실된 잔여 세력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에 앞서 왜군이 금산성에 들어왔을 때 감사 이광은 전 전적 이정란(李廷鸞)을 전주 수성장으로 삼아 전주 부윤 권수와 함께 전주 부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부윤 권수는 7월 2일 병으로 죽게 되고, 이광이정란을 중심으로 수성 태세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사 최철견도 관군을 거느리고 이정란과 함께 수성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왜군이 웅치를 넘어 전주 부성에 다다르자, 전라 감사 이광이정란을 시켜 전주부의 각종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각 읍 군졸을 거느리고 만경대(萬景臺) 산정으로 나가 진을 치고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다. 이들이 낮에는 의병(疑兵)을 설치하고 기치(旗幟)를 가득 세우고 밤에는 거화(炬火)를 늘어뜨려서 서로 응하고 병사를 엄하게 하여 수비 태세를 갖추었기 때문에 웅치를 넘어온 왜군이 전주 부성을 공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광의 명으로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웅치로 가던 황진이 전주에 도착하여 이들 왜적을 안덕원 너머에서 격파하게 되었다. 즉, 황진의 반격으로 안덕원에서 패배한 왜군은 소양평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황진은 밀어붙여 대승리 골짝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을 안덕원 싸움이라고 하는데, 웅치 전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황진에게 패배한 왜적은 진안 용담을 거쳐 금산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웅치 전투로부터 안덕원에 이르는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진산에 주둔하고 있던 고경명이 7월 9일에 호남 의병을 거느리고 웅치를 넘어 전주성을 공격하던 왜군의 근거지였던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다음날 순절하였는데, 이러한 고경명의 금산성 공격은 전주를 공격하던 왜군이 안덕원에서 황진에게 패배당하고 철수하도록 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웅치 전투의 역사적 의의]

웅치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전투였는가 하는 것은 당시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행주대첩의 주장인 권율도 후일 그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에게 자신이 전란 중에 거둔 전공이 웅치의 공이 행주의 공보다 위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권율웅치에서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웅치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전라도 군대가 형식상 권율의 휘하 사졸이었다는 점에서 권율 자신의 전공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와 관련하여 『선조실록』에서도 권율이 군대를 보내어 웅치에서 왜군을 막아 싸웠다고 기록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권율의 공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율웅치의 공을 행주의 공보다 크다고 한 것은 웅치 전이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중추 인물이었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라도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을 웅치 전투 때문이라고 평하고 있다. 즉 ‘적병의 용맹 있는 자는 웅령 전투에서 많이 죽었으므로 기운이 이미 다 없어졌다.’고 말하고 ‘전라도 한 도만이라도 보전되게 된 것이 이 싸움으로 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황진의 행장에 의하면, 일본 승 화안(和安)이 조선에 와서 연위사(延慰使)인 이성구(李聖求)에게 자신들이 전쟁 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왜군이 조선에 와서 당한 실질적인 첫 패배일 뿐만 아니라, 이 전투를 계기로 전라도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결국 전라도 때문에 조선 정복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가장 크게 패한 전투로 인식한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웅치 전투임진왜란 초기 전황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전라도로 침공해 들어오는 왜적을 막아 호남을 지킨 전투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선을 구한 전투라고 할 것이다.

[웅치 전투 참전 인물]

웅치 전투는 전라도 지역에서 여러 수령들이 거느린 관군과 지역의 의병이 참전하였다. 관군으로서는 웅치에서 순절한 김제 군수 정담이 거느리는 김제 지역의 사졸, 나주 지역의 사졸을 거느린 나주 판관 이복남. 그리고 동복 현감 황진이 거느리는 동복 지역의 군사 등 참전하였던 것으로 나타나며, 기록에 따라서는 해남 현감 변응정(邊應井)이 거느리는 해남 지역의 군사도 참전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김제 군수 정담을 따라 참전한 안휘(安徽) 박석정(朴石精), 박정영(朴廷榮), 조성립(趙成立) 등과 같이 각 지역의 여러 인사들도 수령을 따라서 참전하였다. 의병으로는 전주 지역에서 의병장 황박이 거느리는 의병, 고부의 김제민(金齊民)·김안(金晏) 부자가 중심이 된 의병, 진안의 김수(金粹)·김정(金精) 형제가 거느리는 의병 등도 참전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웅치 전적지]

전라북도에서는 1976년에 전주와 진안을 잇는 구 신작로 상의 곰티재 부근인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원을 웅치 전적지로 설정하여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하였으며, 1979년 12월에 곰티재 정상으로부터 약 200m 되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쪽에 웅치 전적비(熊峙戰蹟碑)를 세웠다.

전적비가 세워진 지역은 조선 후기 전주-진안 간의 대로가 지나는 곳이므로 이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 전투는 진안에서 웅치로 넘어오던 길목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웅치 전적지의 대부분 지역은 오늘날의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지역에 해당하는 웅치의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진안군 세동리 지역에서 완주군 소양면으로 넘어오는 길은 전적비가 서 있는 웅령로를 비롯해서 덕봉 마을을 지나 두목리로 이어지는 덕봉길, 적천치 마을에서 삼중리로 이어지는 적래재길 등 세 갈래가 있다. 따라서 웅치 전투는 이 세 곳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웅치 전적지의 위치는 현재 전적비가 서 있는 곰티재의 길목과 덕봉길로 들어오는 길목, 그리고 덕봉 마을 북쪽의 적천 마을 등의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지역과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대에 걸치는 지역으로 비정된다.

특히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 마을에는 조선 전기 요광원 터로 비정되는 원터와 구 웅치동 등의 지명이 전하고 있어서 이곳이 임진왜란 당시 웅령로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임진왜란과 관련한 지형 지물과 지명 등 전승 자료가 전해오고 있어서 이곳이 웅치 전투의 주 전적지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덕봉 마을에 웅치 전투에서 순절할 사람들을 모시는 창렬사(彰烈祠)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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