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대동을 꿈꾸는가, 죽도 선생 정여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008
한자 -大同-竹島先生鄭汝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신정일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

조선 최대의 역모 사건이라고 불리는 기축옥사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기축년) 10월 2일에 일어났다. 그래서 기축옥사 또는 정여립(鄭汝立)의 난이라고 불리고 있다.

정여립의 자는 인백(仁伯)·대보(大輔), 호는 죽도 선생(竹島先生)이라고 불렸다. 그가 태어난 곳에 대한 기록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주 동문 밖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고, 남문 밖[현 교동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한국 지명 총람』에 의하면 그가 태어난 곳은 행정 구역상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이고, 아버지 정희증(鄭希曾)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는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한 정희증은 익산 현감을 지냈으며 1572년에는 첨정[종 4품]벼슬에 올랐고, 같은 해 12월 6일에는 경상도 청도 군수로 부임하였다.

[율곡 이이의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던 정여립은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이이·성혼의 문인이 되었다. 이후 이이(李珥)성혼(成渾)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1583년 예조 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으로 당을 옮겨 죽은 스승 이이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였다. 이 사실을 안 의주 목사 서익(徐益)이이의 조카인 이경전(李慶全)이 상소를 올리자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기며 정여립을 ‘형서(形恕)[송나라의 학자 정이천의 제자로 선생을 배반한 못된 인간의 표본]’라고 칭했다.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

이후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을 것을 예감한 정여립은 벼슬을 내어놓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 없이 사람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정여립을 ‘죽도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정여립이 조직했던 대동계의 실체는 무엇일까? 대동계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들이 따른다. 모반을 위한 무력 집단이 아니라,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실의에 차 있던 정여립이 불만을 달래며 불평 많은 시골 무사나 선배들과 어울려서 활쏘기를 겨루며 술 마시고 놀던 향촌의 친목계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본래의 대동계는 원래 주나라에 어질고 재능 있는 인재를 등용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향사례(鄕射禮)를 지역 사회에서 구현한 집단이었다. 『주례』에 의하면 향사례는 지역 단위인 주(州)에서 정월 중 길일을 택해 행하게 되어 있었으며, 조선 성종 대에는 사림파가 유향소 복립 운동을 추진하면서 그곳에서 시행해야 할 의례로 추천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향사례는 지방의 결속과 자치를 위한 방편이었고 지역 자치 조직의 기능을 겸비하고자 했다. 결국 정여립은 그 당시 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지역 자치와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대동계를 조직하였을 것이다. 곧 대동계 조직은 그가 꿈꾸었던 대동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정여립이 조직했던 대동계는 그 당시 마을의 자치를 맡았던 대다수의 계와 달리 반(班), 상(常), 노(奴)가 모두 계원이 되었다는 점과 조직의 범위가 군현의 경계를 뛰어넘어 광역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활쏘기에 치중된 점이 다른 계들과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대동계가 어떤 성격으로 어떻게 운영되었고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정여립은 1587년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중 의연(依然)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 『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기축옥사가 발발하다]

그러던 중에 기축옥사가 발발한 것이다. 기축옥사에 대한 글이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제14권 선조조 고사본말, 기축년 정여립의 옥사 서두에 이렇게 실려 있다.

“기축년(己丑年) 10월 2일 황해 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가 들어왔다. 이날 밤에 삼정승·육승지·의금부 당상관들을 급히 들어오게 하고 다시 숙직에 들어와 총관·옥당 상하번들도 모두 입시시켰다. 다만 춘추관 검열로 사관에 입적하고 있었던 정여립의 누이의 아들인 이진길(李震吉)만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비밀 장계를 내려서 보이니, 그것은 안악 군수 이축(李軸)·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역적 사건을 고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수찬을 지낸 전주에 사는 정여립이 모반하여 괴수가 되었는데 그 일당인 안악에 사는 조구(趙球)가 밀고했다고 되어 있었다. 즉시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나누어 보내고 이진길을 의금부에 내려 가두게 하였다. 이진길은 곧 여립의 생질이었다.”

선조가 먼저 정승들에게 물었다. “정여립은 어떠한 사람인가?” 영의정 유전(柳琠)과 좌의정 이산해(李山海)는 “그의 인품을 모른다.”고 대답하였고,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그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는 고변장을 들어 상 아래로 내던지며 “독서하는 사람의 소위가 곧 이와 같단 말인가”라고 하고 승지를 시켜 읽도록 하였다.

한 줄 두 줄 읽어내려 감에 따라 정여립의 음모가 계속 드러났다. 그 역모의 시나리오가 『선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축년 겨울 서남에서 일시에 거병하여 얼어붙은 강진을 건너 서울로 직범하여 무기고를 불사르고 강창을 탈략하며 심복을 도내에 배치하고 자객을 분송하여 먼저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 판서를 죽이고 거짓 교지를 꾸며서 방백과 병사·수사를 죽이며 대간을 가만히 사주하여 전라 감사와 전주 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일어난다.”

좌우 신하들은 모두 목을 움추렸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선조는 고변을 미심쩍게 여겼다. 그래서 대신들에게 “내가 여립의 위인됨을 아는데 어찌 역적에까지 이르렀을까?”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언신은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며 “정여립이 어찌 역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조가 다 읽은 뒤에 대신들에게 그 처리 방법을 묻자 대신들은 즉시 금부 도사를 보내서 정여립과 그의 도당은 물론이고 고발한 자들 역시 잡아오게 하자고 하였다.

[정여립 위기에 처하다.]

그때 영의정 유전이 “금부 도사만으로는 염려되는 점이 있으니 토포사를 보내서 비상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그 즉시 하옥시켰다. 국청에 나아간 정언신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정대보가 어찌 역적이 될 수 있겠는가. 고변한 사람들을 10여 명만 잡아 죽이면 뜬소문이 그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조는 위관(委官)[역모건 등 큰 사건을 전담 처리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하는 재판장]에 우의정 정언신을 임명하였고, 정여립을 체포하기 위해 선전관과 금부 도사를 전주로 급파하였다. 그들 모두 정여립과 같은 동인이었다.

그때 황해도 안악에 있던 변숭복(邊崇福)은 조구가 고변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안악에서 금구까지 나흘만에 도달하여, 정여립에게 그 진상을 알렸다. 변숭복은 별명이 범(犯)일 만큼 용맹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정여립은 곧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박연령의 아들 박춘룡과 함께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집에 남아 있던 가족들도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선전관 이용준(李用濬)과 내관 김양보(金良輔), 금부 도사 유담(柳湛)이 금구와 전주 정여립의 집을 급습하였으나, 전날 밤에 도망간 정여립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 집에는 승려 지영(志永)과 사장(社長), 그리고 창고에 백미 200석과 잡곡 100석만이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금부 도사 유담이 전주에서 10월 7일 정여립이 도주한 사실을 알리는 장계를 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인들은 정여립이 서울로 붙잡혀 오면 유창한 말로써 그간의 상황을 해명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황해 감사 한준의 장계는 박충간의 보고에 의한 것이라고 했을 뿐 첩보의 취득 경위 등에 관한 설명이 빠져 있는 등 엉성하고 막연했다.

그 때문에 장계의 내용이 무근지설일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동인들은 정여립의 역모를 믿지 않았으며, 이길(李洁) 같은 사람은 정여립의 도망을 장검(張儉)의 망명에 비유하였다. 장검은 시왕(時王)의 노여움을 받아 죄 없이 도망을 다녔던 후한의 명인이었으므로, 정여립의 무죄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발설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역모 사실을 믿지 않았고 정여립이 올라와서 부인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정여립의 의문의 자살]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것 같다는 선조나 동인 측의 예상과는 달리 옥사는 신속히 확대되었다. 양사의 건의에 따라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을 사관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하옥하였으며, 10월 11일에는 정철(鄭澈)이 고향에서 올라와 선조에게 숙배한 후에 비밀히 차자를 올렸다. 차자의 내용은 속히 역적을 체포하고 서울에 계엄령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선조는 “경의 충절은 익히 알겠다. 의논하여 처리하리라.”라 하였다. 이어 14일에는 독포어사 정윤우·이대해·정수남 등을 삼남에 내려 보냈고, 15일에는 황해도에서 잡혀 온 정여립의 일가 이기(李箕) 등에게 정여립과 공모하였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사형을 집행하였으며, 17일에는 안악 군수 황언륜(黃彦倫)·방의신(方義臣) 등이 역모를 자백하였으므로 처형하였다.

그때 전주에서 놀라운 소식이 올라왔다. 진안 죽도에 있는 별장으로 도망친 정여립변숭복의 목을 찔러 죽이고 자신은 칼을 꽂아 놓고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더불어 한 발만 늦었더라도 조선의 이씨 왕조는 정여립에 의해 무너지고 정씨 왕조가 설 뻔했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정여립의 역모가 사실로서 정착되었고 서인들에 의해 동인들의 피의 숙청이 이루어졌다.

[추풍낙엽처럼 스러진 사람들]

“간교한 무리들이 그 기회를 타 토벌한다는 구실을 빌어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날조를 다하여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은 모조리 다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산곡간의 피난민 수 천 명을 이끌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적탄을 무릅쓰고 군량과 무기를 운반한 공로를 세웠던 오익창(吳益昌)의 상소문이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의 목숨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조선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동소만록』에 의하면 처형 또는 고문사한 사람이 정여립·이발·정개청·최영경을 비롯 53명 이상이고, 유배자가 20여 명이었으며 옥에 갇힌 사람이 4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발의 광산 이씨 문중과 화순의 조대중 가문은 멸문지경에 이르고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있던 그들의 인맥도 끊어지고 말았으니, 기축옥사의 진원지 전주·김제 일대 사람들이나 정여립과 성씨가 같았던 동래 정씨들은 동래 정씨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이 고을 저 고을로 더러는 성씨마저 바꾼 채 뿔뿔이 흩어져 갔다. 이처럼 기축옥사 이후 호남과 영남[지리산 쪽] 일대는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그 지역에 가면 기축옥사의 쓰라린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후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불행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행운이었다.

1590년(선조 23) 6월에 전라도 순찰사 홍여순(洪汝諄)은 역적의 무리를 많이 체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의대부를 받았고, 8월 초하루에는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사람들에게 광국공신(光國功臣)과 평난공신(平難功臣)의 녹권이 내려졌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등급별로 상품을 하사하고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조선 건국 후 열두 번째의 공신 배출이었다.

[호남 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기축옥사]

기축옥사는 위관을 맡은 정철과 막후에서 계교를 내어 사건을 확대시킨 송익필의 ‘사감과 복수심’, 그리고 이이의 죽음[1883]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동인세력을 거세하려던 성혼을 비롯한 서인측의 정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일어났고,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1천 명에 달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약간 과장이 섞여 있다 할지라도 당시 조선 인구가 500여 만 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네 번의 사화보다 많은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기축옥사 이후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천 여 명의 지식인이 희생되었고 곧 바로 미증유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진안 죽도에 남은 정여립의 자취]

기축옥사의 주인공인 정여립이 의문사한 죽도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그 첫 번째가 진안군 상전면 수동리로 가는 길이다. 죽도용담댐이 완공되기 전에는 죽도 유원지로 전주와 대전을 비롯한 대도시 사람들의 휴식처였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철에는 죽도 근처 금강 물에서 지천으로 잡히는 쏘가리며 다슬기며 메기 등의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을 해 먹기 위해 전주·대전 사람들까지 줄을 이었는데, 2000년 가을에 용담댐이 담수되면서 고립된 섬이 되고 말아 그런 풍경들이 사리지고 말았다.

옛 이름이 터일인 수동 마을을 지나면 칼처럼 서 있는 바위 사이를 헤집고 작은 폭포가 나타난다. 병풍처럼 보여서 병풍 바위라고 했던 것을, 개간붐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가막리로 돌아가는 물길을 돌려 논을 만들기 위해 폭파해 버림으로써 이암 폭포라는 폭포가 되어버린 것이다. 상류에서 바라보면 입구 쪽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보이지만 들어가는 쪽에서는 상류 쪽이 보이지 않는다.

겨울에도 푸른 산죽이 많아 이름조차 대섬인 이 섬 아닌 섬 죽도 앞에는 말잔등처럼 천반산[640m]이 우뚝 솟아 있다. 용담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 그루 푸른 소나무 외롭게 서 있는 절벽 아래로 폭포가 흘렀다. 사람들은 흐르는 물줄기 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관광객들은 그 폭포를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나라 안에 제일이라는 하회 마을을 감싸고 도는 물도리동이나 내성천 변에 펼쳐진 의성포 물도리동에는 못 미치지만 완벽하게 물이 휘감아 도는 죽도가 한사람의 욕심에 의해 폭포 아닌 폭포로 변형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용담댐이 건설을 시작하면서 보상을 받아 떠나고 지금은 천반산 북쪽을 흐르던 옛 물길을 되찾아 천반산 아래에서 금강의 본류와 만난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여 년 전만 해도 이곳 소리실 마을에는 여덟 가구가 살았었고 가막 분교장 죽도 분교장이 있어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흐르는 금강의 물소리 만큼이나 낭랑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죽도만이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길이 진안의 물곡리에서 좌회전하여 ‘자연 발생 유원지 가막천’이라고 쓰여진 팻말을 지나 가막골재를 넘어가는 길이다. 아랫가막리에서 다리를 건너 천반산 쪽으로 향하면 몇 년 전만 해도 정월 초사흘 날에 당산제를 지냈다는 당산터가 남아 있다.

천반산 산행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초입은 희미하지만 올라갈수록 산길은 뚜렷하다. 능선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좌측으로 난 능선 길을 십 여분 걸으면 십 여명은 너끈이 앉을 마당처럼 생긴 바위가 나타난다. 산 위가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이름 붙은 산, 천반산 아래에서 남쪽 장수에서 흘러내려온 장개천과 동쪽 무주 덕유산에서 시작되는 구량천이, 파(巴)자형으로 굽이쳐 흐르는 중간 지점에서 몸을 합하여 금강으로 태어난다.

이곳 천반산 기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땅에는 천반(天盤), 지반(地盤), 인반(人盤)의 명당(明堂) 자리가 있는데 이 산은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하여 천반산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천반산정여립 장군이 서있고, 부귀산에는 관군이 서 있어 서로 싸웠다는 이야기와 함께 송판서굴에서 정여립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약 15m쯤 되는 이 바위와 20m 거리로 마주보고 있는 뜀바위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정여립 장군이 훌쩍훌쩍 뛰어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다시 연평리 쪽으로 몸을 돌리면 금강의 물줄기가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하여 달려오고 이곳에서 30m쯤 바위 사이로 비탈진 길을 내려가면 천반산의 명물 송판서굴이 나타난다. 바위굴 2개가 15m쯤의 거리를 두고 서북쪽을 향하여 쌍굴을 형성하고 있는 이 굴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굴로서 큰 굴의 길이가 7m쯤 되고 작은 굴은 5미터쯤 되며 10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쉴 만한 넓이다. 송판서굴의 중간쯤의 바위틈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약수라고 전해지는 한 줄기 물길이 있다. 이 굴은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이 대동계원들을 거느리고 병마를 훈련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진안군 『통계 연보』에 따르면 40여 년 전 이 천반산 아래 죽도 근처에서 정여립과 그의 일파가 쓰던 것으로 보이는 솥과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름이 6m쯤 되는 거대한 돌솥이었는데, 솥이 어찌나 크든지 솥전 난간으로 젊은 장정들이 뛰어다녔다고 하며, 화살 촉 한 개로 낫을 다섯 개나 만들고도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발굴된 돌솥은 어쩌다가 물속으로 다시 묻혀버리고 말았고, 당시 돌솥을 실제로 보았다는 노인네들은 언젠가 그 돌솥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여립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전주 지역에서 활동한 시절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는데, 이 죽도에 건물을 지어 놓고 훈련 시에 그 무기를 썼었다는 그것 역시 불운했던 혁명가 정여립에 대해 품었던 이 지역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이 만들어낸 신화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정여립이 썼던 무기를 주었다거나 그 당시 기왓장이 발견되었다거나 하고 안쓰런 이야기를 흘린 것이리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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