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의 침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904
한자 倭寇-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하태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380년 - 진안 지역에 왜구 침입

[정의]

고려 말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 왜구가 침입한 사건.

[개설]

왜구(倭寇)는 삼국 시대부터 출현하였지만, 고려 시대에는 고종(高宗) 때부터 시작하여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빈번하게 침략하였다. 왜구가 집중적으로 출현했던 시기는 충정왕(忠定王)[재위 1349~1351] 이후 1392년(공양왕 4)까지 약 40여 년 간이며, 그 중에서도 우왕(禑王) 재위 14년 간[1374~1388]에 가장 극심하였다.

기록상으로 볼 때, 고려 시대 전국적으로 약 529여 차례 왜구가 침입하였고, 이 중 전라도 지역에는 78여 회의 침입이 있었다. 진안 지역에는 1380년(고려 우왕 6) 진포(鎭浦)에 왜구가 출몰하였으며, 이때 이성계(李成桂)가 진안을 거쳐서 운봉으로 가 황산 대첩(荒山大捷)을 거두고 마이산을 지나 회군하였다고 한다.

[역사적 배경]

1380년(우왕 6) 8월 왜구 500여 척이 진포(鎭浦)[전라북도 군산]에 침입하여 연해의 주군(州郡)을 불사르고 주민을 죽이거나 잡아가려고 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최무선(崔茂宣) 등이 화포를 사용하여 진포에 정박한 배를 불살라 버리고 대첩을 거두었다. 진포에서 패한 왜구는 퇴로를 잃고 옥주(沃州)[지금의 옥천]를 거쳐 상주 지역으로 가서 먼저 상륙한 왜구와 합세하여 각지를 떠돌면서 약탈, 방화, 살인을 자행하였다. 고려에서는 배극렴(裵克廉) 등이 이들을 함양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배언(裵彦) 등이 전사하였다. 왜구들은 이어서 남원산성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물러나 운봉현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둔집하였다. 이때 이성계가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남원에 이르러 운봉의 황산(荒山)에서 아지발도[阿只抜都]가 이끄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경과]

1380년(우왕 6)에 진포(鎭浦)에 쳐들어왔던 왜구의 무리가 용담 지역에 침입하였다. 그들은 진포에서 최무선에게 패배한 뒤 내륙으로 들어와 여러 주군을 약탈하면서 용담의 경내까지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용담 현령피원량(皮元亮)이 염군리(廉君利)·고윤덕(高允德)과 함께 현의 남쪽에 목책을 박고 석잔(石棧)[돌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섯 곳에 돌을 쌓아 놓고서 왜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돌을 굴려 적을 분쇄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왜적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가 온 경내가 무사하였다고 한다.

진포에서 퇴각한 왜구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월(引月)에 모여 있자 이성계가 삼도 도순찰사가 되어 토벌을 위해 출정하였다. 이때 진안 북쪽 삼십리에 있는 용담의 경계를 지나다가 길이 좁자 석공으로 하여금 길을 넓히게 하고 지나갔는데, 이 때문에 ‘새벼리[銘峴]’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고 회군할 때에도 진안의 마이산에 들러 머물렀다 갔다고 하는데, 현재 마이산의 이산사(駬山祠) 옆 암벽에 ‘주필대(駐蹕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한 진안현의 서쪽 45리 되는 곳에 이성계가 진을 치면서 친히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御水井)이 있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도 고려 우왕 대 왜구가 출현하였고, 용담 현령 피원량처럼 지역 주민들은 왜구 침략에 대비하고 적극적인 대응하였다. 또한 새벼리, 주필대, 어수정 등은 황산대첩을 거둔 이성계의 진군로와 회군로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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