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학 계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869
한자 -興學契案-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 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916년연표보기 - 「흥학 계안」 작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9년 - 장학계에서 흥학계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6년 - 「흥학 계안」 진안 역사 박물관에 기증
소장처 진안 역사박물관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내사양길 7[단양리 813]지도보기
간행처 중평 마을 흥학계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 마을 지도보기
성격 성책 문서
저자 중평 마을 흥학 계원
편자 중평 마을 흥학 계원
규격 23.5×28㎝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 역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수면 도통리 중평 마을의 계안 문서.

[개설]

일반적으로 장학계와 흥학계는 지방 유지나 학부모 또는 특정 가문이 그 지방 학생들이나 집안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한 계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직된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 마을의 흥학계(興學稧)는 마을 아동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서당계(書堂稧)이다. 취학 연령의 자녀를 둔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계를 조직하였다. 1926년까지 장학계로 운용되다가 1929년부터는 흥학계라는 이름으로 재정비하여 1990년대 중반까지 약 80년간 유지되었다.

중평 마을의 교육 기관은 계가 조직될 당시만 하더라도 서당만 1개소 있었다. 이후 1922년 진안군 마령면에 마령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두 곳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 중평 마을 아동들은 서당 교육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일제의 서당 교육 탄압으로 인하여 몰래 교육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점차 서당보다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중평 마을 「흥학 계안」 수계기(修契記)는 원래 마을 회관에 있었으나 보관에 어려움이 있어 마을 주민들의 뜻에 따라 2006년에 진안 역사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중평 마을에서는 1916년부터 장학계가 조직되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 중평 마을 아동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서당계이다. 이때부터 「흥학 계안」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1927년 이후부터 보이지 않다가 1929년에 흥학계 명칭으로 다시 수계기에 등장한다.

[형태/서지]

중평 마을 흥학계 수계기의 문서 크기는 23.5×28㎝이다.

[구성/내용]

중평 마을의 장학계와 흥학계 수계기(收稧記)는 95장이 남아 있다. 1916년부터 1945년까지 49장, 1946년 이후 것은 47장이다.

계는 출자된 곗돈과 이자를 가지고 운영되었는데,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운영된 장학계의 절목에 따르면 곗돈의 이자 증과 계원간의 강제 규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첫째 곗돈을 거두어들일 때 만약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함께 합하여 강제로 처리한다. 둘째 계원 가운데 만약 그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면 규칙을 바로잡기 위해 명단에서 이름을 빼고 자격을 박탈한다. 셋째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면 계원이 아니다. 넷째, 계를 치르는 날짜는 10월 마지막 날로 한다. 다섯째, 강신일에는 술과 쌀 1말만 하고 이외에 다른 것은 내놓지 않는다 등이다.

1929년부터 조직된 흥학계에는 계 소유의 전답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흥학계의 농지 관리 및 유사 관리 서약서에는 유사에게 토지 운영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부여한다고 적혀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사는 1년을 기한하였지만 연임의 제한은 없다. 둘째, 원래 계의 농지 경작 포기 증서를 새로운 유사가 효력 있게 작성하여 미리 본 계에 제출해야 한다. 셋째, 계원 가운데 가난하여 살기 어려운 사람을 먼저 시작하게 하며 해마다 돌아가며 책임을 주기로 한다. 넷째 농지가 무너진 곳을 수리하는 일에 대한 책임은 그해 유사가 져야 하는 등 책임을 정하고 있다. 그 밖에 낱장의 많은 계 문서에는 당해 연도 계원의 명단과 대곡(代穀), 수곡(收穀), 이자에 대해서 기입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향촌 사회 조직체의 실상, 계원간의 입출(入出), 처벌 조항 등에 대한 내용 등을 통해 과거 마을 공동체 자치 규범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조선 시대 향약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이것이 19세기를 전후해서 동계와 송계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제 강점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장학계와 흥학계란 이름으로 마을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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