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849
한자 崔斗七墓道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160-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83년 - 최두칠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56년 - 최두칠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최두칠 묘도비 건립
현 소재지 최두칠 묘도비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160-4 지도보기
성격 유적|비
관련 인물 최두칠
크기(높이,너비,두께) 200㎝[높이]|57㎝[폭]|27㎝[두께]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 마을 용계사 앞에 있는 최두칠의 묘도비.

[개설]

추모재(追慕齋) 최두칠(崔斗七)[1683~1756]은 만육(晩六) 최양(崔瀁)의 후손이고 송력천(宋櫟泉)의 문인이다. 학행이 세상에 드러나 그의 문하에서 높은 덕의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진안군 마령면 원평지 마을 오른쪽 큰길가에 있는 용계사(龍溪祠)에 독향되어 있고 1945년에 최두칠 묘도비가 건립되었다.

[건립 경위]

추모재 최두칠의 학문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0년(철종 11)에 용계사를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은 뒤 1960년 다시 설단되었고 1980년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 최두칠 묘도비용계사가 다시 설단되기 이전인 1945년에 향당에서 건립하였다.

[위치]

마령 우체국에서 마령 고등학교를 지나 1.2㎞ 이동하면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 마을 우측변 용계사 앞에 최두칠 묘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형태]

최두칠 묘도비는 기단인 비대석, 비신, 가첨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의 높이 200㎝, 폭 57㎝, 두께 27㎝이다.

[금석문]

비석 표면에는 “추모재 최공 두칠 묘도비(追慕齋崔公斗七墓道碑)”라고 새겨져 있고, 비석 뒷면에는 묘도비명이 실려 있다. 최두칠 묘도비명은 이조 참판 여흥 민병승(閔丙承)이 글을 짓고 안동 김녕한(金寗漢)이 전액을 썼다. 비명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최두칠만육(晩六) 최양(崔瀁)의 후손으로 증조부 최종(崔琮)이 단종의 화를 보고 벼슬의 뜻을 버리고 진안으로 들어와 숨어 산 이후로 마령면 평지리에 세거하게 되었다. 최두칠은 숙종 계해년(1683년)에 진안에서 태어나 역천(櫟泉) 송문경공(宋文敬公) 명흠(明欽)이 회천에서 도학을 강의할 때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서당에 가서 글 읽기를 즐겨하여 『심경』, 『근사록』, 『사자소학』, 『중용』, 『대학』에 이르기까지 숙독하여 천리와 인성에 대해 궁구하였다. 또한 성품이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여 큰 흉년에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고 키워서 시집 장가를 보내기도 했다.

1756년(영조 23)[병자년]에 진안 평지리 집에서 졸하였는데 학행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뛰어난 덕을 지닌 이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향당에서 그의 학문과 효행을 열거하여 사당에 제사도 지내고 조정에 천거하기도 했다. 1879년(고종 16)에 특별히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었다.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현위(玄暐), 현휘(玄暉), 현요(玄曜)이다.

[현황]

최두칠 묘도비용계사 앞 도로변에 있는데 용계사와 묘도비는 후손인 최원석이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최두칠은 중앙 정계에서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역 사회에서 학문과 효행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진안군 일대에는 지금도 최두칠과 그의 선조 만육 최양 관련 설화인 「최만육 선생 일화」, 「만육 최양 선생과 최씨 고집의 유래」 등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마령면 평지리 마을의 역사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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