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560
한자 全羅文化硏究所所藏鎭安關聯古文書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백제대로 567[덕진동1가 664-14]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전라 문화 연구소 소장 진안 관련 고문서 작성 시작
작성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전라 문화 연구소 소장 진안 관련 고문서 작성 종료
소장처 전북 대학교 전라문화 연구소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백제대로 567[덕진동1가 664-14
성격 문헌|문서
관련 인물 장지중 등
용도 상서 및 통문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관련 고문서 중 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문과 상서류.

[개설]

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에 소장된 진안 관련 고문서는 주로 1924년과 1925년에 진안군 백운면진안면 가림리 등지에서 작성한 것으로 효자 장지중의 효행을 포장하자는 내용의 통문과 상서류이다. 한편, 진안면 가림리 원탄곡 마을에 살았던 장지중은 인동 장씨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13대손이며, 장흥달(張興達)의 9대손이다.

[제작 발급 경위]

전라 문화 연구소 소장 진안 관련 고문서는 진안의 효자 장지중의 효성을 포상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형태]

전라 문화 연구소 소장 고문서는 1924~1925년에 구장(區長)이 진안 면장, 백운 면장, 명륜당에 보낸 상서류와 통문류이다. 문서는 제목, 내용, 연명자, 제사로 구성되어 있는 조선 시대 일반적인 통문, 상서류와 그 형식적인 면이 같다. 다만 1917년 이후 등장한 직역인 구장, 즉 지금으로 말하면 이장이 면장, 명륜당에 직접 포장을 추천하는 주체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조선 시대 효열의 포장은 유학의 실천으로서 매우 중시되었기 때문에 문서의 발급의 주체가 향교였고, 수급의 당사자 또한 성균관 및 예조였던 반면 일제 강점기에는 구장이 직접 면장과 명륜당에 추천장을 보내고 있는 차이를 보여준다.

전라 문화 연구소 소장 고문서 중 진안 관련 고문서는 5장으로 1924년과 1925년에 작성된 것이다. 크기는 각각 47.4×84㎝, 49.8×84.5㎝, 47.7×84.3㎝, 50×92.7㎝, 47.5×52.7㎝이다.

[구성/내용]

진안에 살던 장지중의 포장을 위한 상계, 통문, 상계(狀啓) 등은 일제 강점기인 1924~1925년에 작성된 것으로 조선 시대 일반적인 효자 포장을 위한 상서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본 문서류의 발급 주체가 구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구장(區長) 제도는 1917년 10월에 시행된 면제에 의하여 형성된 직역인데, 종래의 동, 리에 구장(區長)을 두어 면장의 명을 받아 동, 리 내의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 후 1931년에는 구장은 각각 소속된 동, 리에 주소를 가진 자중에서 임명하고 읍면리 사무로서 동리에 속한 것을 보조하게 하였으며, 1952년까지 호칭되다가 1954년부터 이장이라 불렸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효열 포장 제도의 변화에 따라 이제 구장이 효자 포장을 추천하는 형식으로 변질된 것이다.

진안군 원탄곡리(元炭谷里)에 사는 장중식(張仲植)[후에 장지중으로 개명]은 인동(仁同) 장씨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13대손이며 갑산(甲山)공 장흥달(張興達)의 9대손이다. 고문서에 의하면 장지중은 ‘어려서부터 효성스럽더니 양친의 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여 시묘를 하여 무릎이 닿았던 곳에 구덩이가 파일 정도여서 어린아이들까지도 ‘효성스럽구나, 장모씨의 효’라고 칭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동창리, 백암리, 호촌리, 운교리, 덕현리, 남계리, 반송리, 초암리, 평장리백운면 사람들의 공의를 드러내고, 정읍, 전주, 남원, 고부, 태인, 부안, 무장, 임피, 진산, 익산, 함열, 용안, 흥덕, 김제, 금구, 만경, 진안, 용암, 금산, 옥구, 여산, 순창, 임실, 무주, 장수 등에 널리 통문으로 알린 것이다. 또한 진안면 가림구내 여러 사인이 진안 면장에게 보내어 상계한 것이기도 하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효열에 대한 포장은 가문의 격을 높이는 중요한 행위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성균관이 황도 유학으로 침식되고 각지에는 유도회가 결성되면서 그 제도가 변질됨에 따라 효열에 대한 포장 또한 남발되었다. 본 통문과 상서류는 1924년과 1925년에 작성된 근대 문서이면서도 그 형식은 조선 시대 상서류, 통문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서 썼다는 점에서 이 문서의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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