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린 고신왕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550
한자 -成石璘告身王旨-
이칭/별칭 「성석린 좌명공신왕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하양지1길 12-3[대량리 66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3년 5월 7일연표보기 - 「성석린 고신왕지」 보물 제746호로 지정
소장처 창녕 성씨 종중 -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지도보기
보관처 어서각 -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하양지1길 12-3[대량리 661]
성격 고문서
용도 교령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제746호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창녕 성씨 종중 소장의 성석린 좌명공신 왕지.

[개설]

고려 시대 말과 조선 시대 초기 문신이었던 성석린(成石璘)에게 내려진 왕지(王旨)로 1983년 5월 7일 보물 제746호로 지정되었다.

[성석린과 고신왕지]

성석린(成石璘)[1338~1423]은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고 승진하여 사관(史官), 이어 예문관(藝文館), 삼사(三司), 전의시(典儀寺), 양광도관찰사, 문하부평리 등을 지냈다. 이성계의 역성 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錄券)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물었는데,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석린태조의 옛 친구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 비로소 태조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성석린 고신왕지」는 1402년(태종 2)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 삼등 공신(翊戴佐明三等功臣)에 포상된 바 있는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에게 보직이 주어지는 왕지(王旨)이다. 1983년 5월 7일 보물 제74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동향면 대량리 양지 마을 서쪽에 있는 어서각에 모셔져 있다.

[제작 발급 경위]

성석린 고신 왕지는 1402년(태종 2)에 발급한 것으로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 삼등 공신에 포상되었다.

[형태]

성석린 고신왕지는 7행으로 쓰여 졌으며, 상단 일부의 약간과 하단 끝의 일부가 훼손된 이외는 대체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지질은 저(楮)의 장지(壯紙)이다. 필체는 조선 시대 초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초서체(草書體)이고, 크기는 가로 61.1㎝ 세로 32㎝이다.

[구성/내용]

전문(全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지(王旨) 성석린(成石璘)을 수충동덕(輸忠同德) 익대 좌명공신(翊戴佐明功臣)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 부사겸(領義政府使兼) 판개성 유후사(判開城留後司)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 춘추관 영사(領春秋館事)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임명한다. 홍무(洪武) 35년 11월 18일

관명(官名)은 여말선초의 관직이 병용(幷用)되고 있으며, 연호 위에 찍은 도장은 ‘조선 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으로 보이며, 명나라에서 보내온 금인(金印)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지방의 교령류로서 왕지(王旨)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이것을 봉안하고자 세운 어서각(御書閣)은 1883년에 세워진 것으로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어서각은 성석린 고신왕지가 임금의 글씨로 써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만, 왕지의 글씨가 태종의 글씨라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