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면 전주 이씨 고문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549
한자 -程川面全州李氏古文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이상연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모정리 두곡 마을에 거주하던 전주 이씨 소장 고문서.

[개설]

「정천면 전주 이씨 고문서」진안군 정천면 모정리 두곡 마을에 거주하였던 전주 이씨 이상연과 그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로서 총 201점이다. 그 중 낱장 고문서는 149점이며, 성책 고문서는 52점이다. 이상현은 만년에 장수 현감을 지낸 뒤 귀향하지 않고 진안 정천면 모정리 두곡(頭谷)에 정착하였다. 그가 장수 현감으로 부임하던 때가 1860년이었다. 그 후 전주 이씨는 최근까지 140여 년 동안 진안에 거주하였다.

[정천면 전주 이씨]

이상연(李象淵)[1800~1871]이 만년에 정착한 곳이 진안 정천면 모정리 두곡(頭谷)이었지만 그 선대는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고양·강화·광주 등지에 거주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대표적 서울 양반 가문이었다. 전주 이씨는 정치적으로는 서인으로 소론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혼인 또한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조선 중·후기에는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여 당대의 명가(名家)로 꼽혔고, 가세(家勢)의 부침이 있기는 하였지만 조선 말기까지 학문은 끊이지 않았다. 이 가문에 문헌이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관리될 수 있었던 것도 가학(家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진안 전주 이씨의 고문서를 두고 볼 때 그 중심 인물은 이정영(李正英)[1616~1686]과 이상연이다. 이정영의 자(字)는 자수(子修)이며, 호는 서곡(西谷)이다. 시호(諡號)는 효간(孝簡)이다. 해남의 이순신 명량 대첩비(李舜臣鳴梁大捷碑) 등 수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다.

이상연은 자가 내심(乃心)이며, 호는 상한(上瀚)이다. 중옹(中翁) 이광찬의 직계 후손이다. 1859년(철종 10)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추천되었다. 이에 그 이듬해인 1860년에 장수 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때 남원 진관 병마절도사를 겸하였다. 이후 1864년(고종 1)을 전후해서는 희릉(禧陵) 직장(直長) 등을 지냈으며 당시 서울에 거주할 때 제출한 호적이 전한다. 묘소는 진안군 용담면 이포리에 있다. 부인은 동래 정씨[1796~1870]이다. 후손에 따르면, 고종이 그 후손에게 이포리 묘소로부터 강 건너 사근다리 뒷산 일대를 하사하여 그 자손들이 정천면 모정리 두곡 마을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장수공유시(長水公遺詩)』, 『장수공시(長水公詩)』와 같은 시문집을 남겼다. 특히 『장수공유시』에는 그가 시를 지으면서 느낀 시감(詩感)이나 당시의 정황을 소상히 밝히고 있어, 정천면 전주 이씨 특유의 자상하고 깊이 있는 시심(詩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제작 발급 경위]

전주 이씨 가문에서 남긴 고문서는 8종 201점으로 그 초고의 시문 형태 및 서간류와 필첩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고문서는 기관과 개인, 개인 간 주고받는 것으로 그 종류와 형태, 발급 경위는 일반적인 고문서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형태와 구성 및 내용]

정천면 모정리 두곡 마을전주 이씨 가문에서 남긴 고문서는 총 201점이다. 그 중 낱장 고문서는 149점, 성책 고문서는 52점이다. 이를 다시 분류하면 교령류 4점, 소차계상류 7점, 첩관 통보류 8점, 증빙류 2점, 명문 문기류 1점, 서 간통보류 111점, 치부 기록류 25점, 시문류 43점이다. 특징적인 고문서 몇 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소지류(所志類) : 발괄[白活]

정천면 전주 이씨 가문의 많지 않은 소지류 가운데 발괄[白活] 2건이 주목된다. 늘 가난한 가계(家計)를 유지해 왔다고 하는 이씨 가문은 1884년 600량이라는 돈을 남에게 꾸어주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가난은 절대적 빈곤으로 보기 보다는 양반 가운데 상대적 빈곤이라는 의미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또 이 민원(民願)을 이씨 가문의 수노(首奴)가 대행하는 데서도 노비 소유주로서의 이씨 가문의 사회 경제적 처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2. 첩관 통보류(牒關通報類)

관(關)·서목(告目)·첩정(牒呈)·서목(書目)은 모두 1860~187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서 이상연이 장수 현감으로 재직할 때 작성된 문건들이다. 내용은 대개 관과 관 사이에 오간 공문서이다. 1867년 관문(關文)은 남원 도호부사가 장수 현감 이상연에게 내려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은 곡성현 정배(定配) 죄인을 당일 압송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것이다.

3. 증빙류(證憑類), 명문 문기류(明文文記類)

증빙류에는 완문(完文) 및 도부(到付)가 각각 1점씩 실려 있다. 1866년에 작성된 도부(到付)는 고문서 양식상 매우 귀중한 문건이다. 도부란 어떠한 공문 또는 물건을 ‘접수’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따라서 오늘날 영수증과 같은 성격을 가지는 문서이다. 본서의 도부는 장수 현감 이상연이 종친부에 예목전(禮木錢) 15량과 도부채(到付債) 5전(戔)을 납부하고, 그 사실을 종친부에서 확인받은 것이다. 종중 예목전이란 그가 전주 이씨의 일원이기 때문에 부담하는 돈이었으며, 도부채란 일종의 부대 경비를 말한다. 목판으로 도부의 문서 양식을 만들었는데, 행정의 간편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이같이 빈번하게 반복되는 고문서는 그 서식을 만들어 양식화하는 것이 이 시기의 경향이다.

조선 후기의 완문은 종중 또는 서원·사우의 이권을 보호 유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전주 이씨 가문 소장의 완문 또한 이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 내용은 이포리(伊浦里)에 소재한 이씨 가문 선산 수호에 관한 것이다. 이 완문을 통해 선산의 주산인 당후봉(堂後峰), 안산(案山)인 고남치(高南峙) 지역에 대한 입장(入葬), 그리고 송추(松楸)의 작벌(斫伐)을 금지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정천면 전주 이씨 후손들은 이곳 산지를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완문은 산지(山地)의 이용권을 담보하는 문서였지만 훗날 소유의 근거가 되었다.

명문류(明文類)에는 1건의 전당 문기(典當文記)가 있다. 원문에서는 전권(典券)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전당 문기란 토지, 가사 등 물건을 담보로 금전을 빌린 뒤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를 말한다. 원래 전당 문기에는 토지 등 담보로 잡은 물건의 내용과 대차 기간, 대출액, 그리고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의 조치 등이 기재된다. 본 문서는 1890년(고종 27) 12월에 이씨 가문에서 안생원(安生員) 댁에 돈을 꾸어 주고 작성한 문기이다. 꾸어준 액수는 전문(錢文) 50량이고, 전당 잡은 물건은 4두락지, 갚을 기한은 이듬해 2~3월 사이였다. 갚지 못했을 때의 조치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약속 불이행 때의 조치는 상식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굳이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정천면 모정리 두곡 마을에 거주하였던 전주 이씨 문서라는 점에서 진안군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겠으나 초고 형태의 시문과 서찰, 필첩 등이 다수이고 진안 지역의 특성을 보여줄 만한 고문서는 많지 않다. 선계로서 진안에 정착한 전주 이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면서 이씨 가문의 여러 저술들은 이른바 강화학파 연구 자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일찍이 이 자료에 대하여 주목하였던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고문서 집성』 53책과 54책으로 성책하였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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