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138
한자 政治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주민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통해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한국 사회에서 근대적인 정치 제도의 출발은 1948년 실시된 5·10 선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제헌 국회가 출범하였으며 헌법이 공포되고 근대적인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 시민 의식이 형성될 수 있는 기회가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의 정치 제도가 민주적인 시민 사회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 지역 사회의 주민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 의식을 지니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기반으로 정치 세력으로 형성되기는 매우 어려운 사회적 조건에 처해있었다. 예를 들어 6·25 전쟁을 경험하면서 이념적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정치적 지역 주의의 틀 속에서 지역 주민의 정치적 선택이 지역 정서에 강하게 묶이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진안군의 정치’를 서술할 수 있는 역사적 자원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동안의 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진안군 주민들의 투표 성향을 중심으로 진안 지역의 정치적 특성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

[진안군의 대통령 선거 결과]

8·15 해방 이후 한국의 대통령 선거 제도는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즉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 선거와 국민 직접 선거 유신 헌법 이후 통일 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간접 선거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직접 선거 등으로 대통령 선거 방식이 변화해왔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 선거였던 초대 대통령 선거는 지역과 무관하게 진행되었고 195년 8월 5일 실시된 대 대통령 선거에서 최초로 직접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이 전국적으로 약 74.6%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는데 진안군에서는 3,159표를 얻어 전체 유효 투표수의 83.9%를 득표하였다. 농촌 지역의 여당 지지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된 3대 선거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3대 선거에서 이승만은 전국 유효 투표의 약 70%를 득표하여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되었는데 진안군에서는 약 81.6%를 득표하였다. 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이 단독 후보로 당선되고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이 선거는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5대 대통령 선거는 내각 책임제 헌법 하에서 간선제로 실시되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대통령 중심제로 헌법이 개정되어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전국적으로 약 85%의 투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진안군은 유권자의 89.1%가 투표에 참여하였다.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가 경합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전체 유효표의 46.6%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진안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49.1%를 득표하였다. 반면 윤보선 후보는 전국 득표율 45.1% 진안군 득표율 약 40.%를 기록하였다.

1966년 1월 3일에 실시된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 후보는 전국 득표율 51.4%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진안군에서 36.4%를 득표하여 윤보선 후보의 53.8%보다 훨씬 낮은 득표를 올렸다. 그리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1971년 4월 7일에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전국에서 53.%를 득표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경합자였던 김대중 후보는 45.3%를 득표하였다. 그런데 진안군에서는 박정희 후보 50.3% 김대중 후보 46.7%의 득표율을 보였다.

이와 같이 6대와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점차 농촌 지역의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정치적 태도의 변화는 당시 정권의 위기의식을 심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97년 10월 7일 이른바 유신헌법을 국민 투표를 통해 통과시키고 이 헌법에 따라 그해 1월 15일 통일 주체 국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될 때까지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987년 1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 투표 참가율은 89.%에 달했다. 선거 결과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로 당선되고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가 8% 그리고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7%를 득표하였다. 반면 진안군에서는 총 1,018명의 유효 투표 중 김대중 후보가 708표를 얻어 70.5%를 득표하였다. 노태우 후보는 781표로 7.1% 김영삼 후보는 158표로 1.5%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이때부터 지방 정치에서 지역주의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1992년 1월 18일에 있었던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진안군에서는 8.8%를 얻는데 그쳤다. 반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는 진안군에서 8.5%를 득표하였다. 또한 1997년 1월 18일의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진안군에서 김대중 후보는 87.3%를 득표하였다.

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87.5%를 득표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지역주의는 영호남 사이의 오랜 지역감정이 정치적으로 표출된 결과로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지형 또는 지방 정치의 특성을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 되었다.

[진안군의 국회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진안군에서는 4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무소속의 오기열 후보가 33.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 년의 임기가 끝나고 1950년 5월 30일에 치른 제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선거에 참여한 정당 및 사회단체가 39개에 달했으며 전국적으로 9명이 입후보하여 10.5:1의 경쟁률을 보였다.

진안군에서도 16명의 후보가 난립하여 혼전을 벌였는데 국민회 소속의 김준희 후보가 1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대 국회는 제대로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다.

휴전 이후 1954년 5월 20일에 3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이 선거에서 1951년 창당된 자유당과 민주 국민당이 처음으로 후보 공천제를 실시함으로써 정당 정치의 기반을 확보하였다.

진안에서는 자유당의 이복성 후보가 10명의 무소속 후보와 경쟁하여 40.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복성 의원이 임기 중 사망함으로써 1954년 10월 5일 보궐 선거를 실시하였다. 보궐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박정근 후보가 9.1%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11월 9일 이른바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모여 1955년 9월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본격적인 양당제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1958년 5월 일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안에서는 무소속의 이옥동 후보와 자유당의 고영추 후보만이 출마하였는데 이옥동 후보가 5.4%를 득표하여 여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전통적으로 여당 강세 지역이었던 진안에서 자유당 후보가 패한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옥동은 당선 뒤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곧 4·19혁명으로 인해 국회가 해산되었다.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이후 1960년 7월 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지만 진안군에서는 무소속의 전휴상 후보가 6,590표[18.9%]를 얻어 당선되었다. 모두 9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민주당의 이희종 후보는 14.1%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어 버렸다.

군부의 박정희가 민주 공화당을 창당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1963년 11월 6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안군은 무주군, 장수군과 병합된 선거구로 개편되었다. 이 선거에서 6명의 후보가 입후보 했는데 민주 공화당에 입당한 전휴상 후보가 35.7%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민주공화당의 전휴상은 이후 7대와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어 4선 의원이 되었다.

유신 헌법이 공포된 이후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로 치러지게 되었다.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수 출신의 신민당 최성석 후보와 무주 출신 무소속의 김광수 후보가 당선되었고 5선에 도전한 전휴상 후보는 3위로 낙선하였다. 무소속의 김광수는 당선 이후 민주 공화당에 입당하였으며 1978년 1월 1일에 실시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주·진안·장수 선거구에 입후보하여 신민당의 최성석 후보와 함께 다시 당선되었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19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제11대 대통령이 취임하고 1981년 3월 5일에 치러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주·진안·장수 지역에서는 3명의 후보가 입후보하여 민정당의 황인성 후보와 민한당의 오상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1985년 2월 12일에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치 활동 금지 해제 조치로 정계에 복귀한 김영삼, 김대중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신한 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무주·진안·장수 지역에서는 4명의 후보가 입후보하였는데 집권당인 민정당의 전병우 후보와 한국국민당의 김광수 후보가 당선되었고 신한민주당의 이상옥 후보는 3위로 낙선하였다.

‘6월 항쟁’ 이후 직선제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 지역주의가 심각하게 노정된 상황에서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 민주당이 호남 지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무주·진안·장수 지역에서도 평민당의 이상옥이 58.5%를 득표하여 집권당인 민정당 전병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2년 3월 24일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호남 지역의 평민당 돌풍에도 불구하고 무주·진안·장수에서는 유일하게 집권당인 민자당의 황인성 후보가 당선되었다. 여기에는 황인성의 출신 지역인 무주에서의 몰표도 작용하였지만 평민당의 공천 파동도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6년에 실시된 제15대 선거에서는 새정치 국민회의의 정세균 후보가 신한국당의 정장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정세균은 이후 제18대까지 4선을 지내고 서울 종로로 선거구를 옮겼다.

2012년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 통합당의 박민수 후보가 당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보면 진안군의 정치적 선택은 1980년대까지 대체로 집권여당의 후보들이 당선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투표 행태는 당시 농촌 지역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치적 성향이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영남·호남 간 지역감정이 정치적으로 활용되어 정치적 지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지방 정치는 지역주의에 의해 운용되었다. 호남 지역의 정치적 패권을 지닌 평민당의 영향 아래에서 진안 지역 주민의 정치적 선택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지역주의의 영향은 최근 들어 조금씩 약화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지역 정치의 가장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진안군의 지방 자치]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지방 자치 제도는 1949년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지방 자치법을 바탕으로 주민이 정치적 참여의 길이 열렸으나 여순 사건, 6·25 전쟁 등으로 연기되다가 195년 4월 5일에 비로소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해 5월 10일에 도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전쟁 이후 치안 불안으로 일부 지역에서는 선거가 연기되기도 하였지만 진안군에서는 예정대로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당시 면의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진안면은 한삼희, 신성모, 윤화중, 양재봉, 박갑진, 김규식, 김남수, 김봉주, 원승희, 김영기, 강대옥, 구명신, 양태식, 용담면은 손오복, 고영주, 김중식, 깅영기, 김종훈, 강한봉, 양기원, 문종채, 고준환, 고응현, 문순학, 안천면은 한완규, 성명석, 정병순, 김태흠, 황한주, 황례필, 김병훈, 최종구, 허순남, 허병구, 동향면은 소학영, 성광열, 한용훈, 성문수, 허동영, 고봉생, 박복득, 박인전, 심인옥, 이음주, 유인민, 상전면은 신남균, 강상운, 이종열, 우제관, 박흥선, 박재인, 장판동, 안향열, 유영두, 원용덕, 김승열, 백운면은 전홍식, 박해성, 김계동, 박찬신, 김영길, 장용마, 최진호, 이성린, 신경범, 전영태, 전병곤, 성수면은 김창덕, 김판술, 이봉환, 설동식, 이병익, 손주상, 손순동, 박순식, 김기용, 이진호, 김상훈, 마령면은 고재명, 양훈승, 오채택, 강준희, 송상암, 정진영, 전봉권, 강진희, 전덕봉, 노봉애, 김기완, 이학봉, 부귀면은 최채홍, 김시곤, 손옥균, 주환, 박영석, 정병주, 목원대, 손택기, 손준기, 손길동, 백동흠, 정천면은 박춘택, 윤종남, 임만규, 임석봉, 정덕주, 왕두순, 이필성, 남세희, 이동열, 안시현, 안화열, 주천면은 김동현, 안환길, 안정현, 김세풍, 박명집, 김영필, 송길용, 정석암, 김기옥, 이춘학, 안복길, 그리고 초대 도의원으로는 안천면 출신의 정병선, 마령면 출신의 전태주가 당선 되었다.

1956년 시·읍·면장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지방자치법」 개정이 실시되고 그해 8월 8일 시·읍·면장과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1956년 8월 13일에는 도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진안군에서는 민선 면장으로 진안면 전계탁, 안천면 허점달, 동향면 유인선, 백운면 장영근, 성수면 유대현, 정천면 안기용 등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면의원은 진안면에 구명신, 정인영, 김용, 이동욱, 한정희, 윤장한, 김원곤, 김남수, 임병철, 강대옥, 김영기, 정래균, 용담면에 최복남, 강홍식, 김종식, 유문갑, 고하상, 배기원, 강한봉, 송후영, 김용호, 박봉식, 문광진, 안천면에 한병희, 한규종, 엄석순, 김인기, 성명석, 임연상, 김택기, 황공주, 최종구, 허성옥, 허병구, 동향면에 성필수, 안규원, 성관수, 함재하, 함일택, 고봉양, 허병열, 박재서, 심재학, 김태종, 정병남, 상전면에 이종열, 박영선, 강상운, 정일록, 박흥선, 김영홍, 우기제, 원용덕, 정병권, 김승열, 백환기, 백운면에 윤태섭, 양병용, 박창섭, 정태균, 신덕범, 신규범, 박찬길, 이창선, 유재술, 이동우, 신성용, 성수면에 이봉환, 정지천, 최수복, 이창규, 신창엽, 손귀동, 서수천, 김상훈, 이진호, 이기용, 전판술, 마령면에 최순길, 이희수, 전병화, 양훈승, 홍성균, 정진영, 전봉주, 송재덕, 박공래, 김갑동, 노태열, 부귀면에 장대섭, 박종진, 유흥석, 이정기, 박종악, 김홍열, 이의상, 손홍오, 윤희구, 김봉준, 유명홍, 정천면에 임만규, 임석봉, 정덕주, 권수덕, 김병근, 송석철, 남세희, 고덕기, 안화열, 안대열, 강병두, 주천면에 소준영, 안환길, 김판용, 박대성, 한종석, 고기주, 정정모, 안복길, 강창도, 김사옥, 유경구 등이 선출되었다.

한편 대 도의원으로는 1선거구에서 마령면 출신 강준희, 선거구에서 상전면 출신 안낭열이 당선되었다.

4·19 혁명 이후 출범한 제2공화국에서 1960년 11월 1일 도지사 서울특별시장 시·읍·면장 동·이장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지방 자치법 개정안이 공포되었다. 이에 기초하여 1960년 12월 26일 시·읍·면장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진안군의 당선자 현황은 아래와 같다.

면의원은 진안면의 김상길, 윤화중, 정인영, 전만홍, 김봉규, 김태일, 김원곤, 이종섭, 이채남, 김준기, 강대옥, 박재기, 용담면의 고원근, 김진창, 이적부, 최복남, 유성근, 박종상, 강한봉, 고기순, 유학준, 이두형, 김상곤, 안천면의 정만년, 정사균, 한병희, 한영기, 성영호, 황기옥, 김영호, 최동열, 최종구, 김자현, 허만열, 동향면의 성필수, 성관수, 성화영, 김장덕, 고봉양, 성일택, 문구현, 심재식, 유경열, 정병남, 김태종, 상전면의 강상운, 고택주, 박한석, 백두흠, 최봉임, 박병권, 전한기, 정준오, 김정열, 유영두, 박무원, 백운면의 유웅준, 장병택, 유재술, 김영식, 김봉권, 정진표, 임종열, 최규수, 신점범, 신관범, 이선, 성수면의 이봉환, 정지천, 이성근, 전판술, 김창덕, 신창엽, 손야상, 김남곤, 김상훈, 김기용, 이진호, 마령면의 전기권, 전병화, 정중암, 최길동, 전동주, 윤화섭, 송재덕, 전병열, 김진엽, 최정철, 노봉열, 부귀면의 이대현, 손석봉, 이남종, 최생남, 장민섭, 전갑석, 김홍열, 손홍배, 손석린, 유명홍, 손용근, 정천면의 박인구, 김기상, 임재규, 손인승, 박만규, 이성춘, 김종덕, 송석철, 안세열, 안재균, 이봉열, 주천면의 안봉열, 이성우, 김도현, 정영식, 이종환, 박두인, 고기주, 이종철, 이영춘, 김철수, 강창도이다.

민선 면장으로는 진안면 이동욱, 용담면 김세환, 안천면 한사규, 상전면 김동주, 성수면 이영규, 마령면 김홍남, 부귀면 김시곤, 주천면 김희태 등이 선출되었다 한편 도의원은 1선거구에 마령면 출신 전태주, 2선거구에 상전면 출신 안낭열이 당선되었다. 1960년 12월 직선에 의한 지방 의회와 지방 자치 단체 구성이 완료되었으나,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로 지방 자치는 중단되고 말았다.

특히 제4공화국 헌법에는 지방 의회를 “조국 통일이 이루어 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지방 자치의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놓았다. 제5공화국 헌법에서 “지방 자치 단체의 재정 자립도를 감안하여” 지방 의회를 순차적으로 구성하되 구성 시기는 법률로 정한다고 바꿈으로써 지방 자치를 실시할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열렸다. 제6공화국에서 지방 자치에 관한 규정을 두고, 개정 지방자치법과 지방 의회 위원 선거법을 제정함으로써 3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1991년 3월 26일 기초 의회 및 광역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진안군에서는 도의원 제1선거구에서 무소속의 임수진이 평민당의 이충국과 무소속의 문대성을 누르고 당선되었고, 제2선거구에서는 평민당의 송영선이 무소속 전신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초대 군의원으로는 진안읍 김정길, 용담면 김광성, 안천면 허복인, 동향면 성재병, 상전면 배진수, 백운면 서철동, 성수면 이종규, 마령면 이한식, 부귀면 국중성, 정천면 박병열, 주천면 손희창 등이 당선되었다.

1995년 6월 27일에는 광역 및 기초 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진안 군수에는 민주당에 입당한 임수진 후보가 민자당 송남오와 무소속의 김규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도의원에는 제1선거구에서 민주당의 송영선, 제2선거구에서 민주당의 박병열이 당선되었다.

제2대 군의원에는 진안읍의 정인철, 용담면 김광성, 안천면 황평주, 동향면 박기천, 상전면 배진수, 백운면 서철동, 성수면 이종규, 마령면 이석원, 부귀면 장시균, 정천면 고재석, 주천면 황양일 등이 당선되었다.

초대 진안 군수에 당선된 임수진은 1998년과 2002년의 선거에서 진안 군수에 거푸 당선되면서 3선을 채우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도의원 출신인 송영선이 2006년과 2010년의 선거에서 진안 군수에 연거푸 당선되었으며, 2014년 3선에 도전한다.

도의원 선거에서는 1998년 6월 4일 실시된 선거에서 제1선거구에 무소속의 정인철 후보가 국민회의의 최용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모두 평민당[이후 국민회의, 열린 우리당, 통합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지방 자치 단체장 및 지방 의회 선거에서도 정치적 지역주의는 지방 정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1.04 오탈자 손회창 → 손희창, 안항길 → 안환길로 수정
이용자 의견
N** 2020년에 맞게 수정해주세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은 수정증보 사업을 통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6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