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111
한자 柳志明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송정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유지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유지명 의병 부대 조직
몰년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유지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유지명 건국 공로 훈장 추서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 사항]

1907년 정미 7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그 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하여 한국군마저 강제로 해산되었다. 유지명(柳志明)[1881~1909] 은 일본의 내정 간섭을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였다. 1907년 9월 초순경부터 스스로 창의 대장 또는 삼남 의병 대장이라 칭하고, 삼남 의병 대장의 인장이 찍힌 의병 소모 격문 1부와 의병 계칙(戒飭)을 기재한 문서 2부를 만들어 게시하니 의병 수 백 명이 모였다. 총 수 백 정을 확보하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각 부서를 정하였다.

이어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호남의 부호인 진사 김회음(金會音)과 이성순(李聖順) 외 수명에 대하여 도조 수 백 석을 집류(執留)할 뜻의 문서 4부를 만들어서 통고함으로써 군량 징발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 후 곧 소속 의병대 수 백 명을 거느리고 용담(龍潭), 고산(高山), 은진(恩津) 등지를 누비면서 1907년 9월 22일에 용담군 건무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한 것을 비롯하여 전기 각 지방에서 일본군 보병, 기병, 헌병과 수차례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10월 3일에는 부하인 정성일(丁成一)·김치삼(金致三) 등 수 십 명을 이끌고 심상의(沈相誼)와 노원섭(盧元燮)의 양 의진과 합세하여 금산읍을 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한 후 일본인 3명을 죽이고 9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우편 취급소와 세무서 그리고 일본인 가옥 9동을 소각하고 양총 2정과 탄환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3일 밤에는 정성일(丁成一)·김치삼(金致三) 등 수십명을 이끌고 용담군 내의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가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한국인 경찰 정상권(鄭尙權)을 쓰러뜨리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서 10월 10일에 유치복(柳致福) 및 동지 3명과 함께 우북면 장암의 이화순(李化順) 집에서 군자금 30원을 조달하였다.

또한 윤병오(尹炳五)라는 사람이 의병을 사칭하고 겁탈, 강간 등 패륜 행위를 하므로 타일렀으나 개전의 정이 없었다. 유지명은 할 수 없이 군기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1908년 12월 24일에 부하 유치복(柳致福)으로 하여금 고산군 운서면 대치동에서 윤병오를 총살하게 하였다.

유지명은 1908년 7월 13일에 일본군 헌병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교묘하게 종적을 감췄다가 다시 유격 활동을 하였다. 1909년 1월 23일에 다시 잡혀 3월에 광주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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