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069
한자 文泰洙
이칭/별칭 태현(泰鉉),태서(泰瑞)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문태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문태수 무주에서 창의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문태수 호남 창의 대장으로 13도 연합 의병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문태수 무주 주재소 습격
몰년 시기/일시 1913년연표보기 - 문태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문태수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문태수 출생지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성격 의병
성별
본관 남평(南平)
대표 경력 호남 창의 대장

[정의]

개항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한 후 진안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경기도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호남 창의대장에 추대되었으나 진격계획이 좌절된 후 다시 본래의 근거지로 돌아와 활약하였다.

[가계]

본관은 남평(南平). 본명은 태현(泰鉉), 별명은 태서(泰瑞). 태수는 의병장 시절의 이름이다.

[활동 사항]

문태수(文泰洙)[1880~1913]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정미 조약이 체결된 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하였다.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을 근거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의병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무주에서 의병 수 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 경에 장수 양악에서 박동식을 만나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군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군 부남면 고창곡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 창의 대장에 추대되었으나 이인영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서울 진격 계획이 좌절되자, 의병을 이끌고 본래의 근거지로 복귀하였다.

1908년에는 무주군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 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교전 중 붙잡혔으나 탈출하였다. 4월 10일 신명선의 의진과 합세하여, 의병 100명을 인솔하고 장수읍을 습격하였다. 마침 주재소 안에는 모두 의병 토벌전에 동원되고 한국인 한 사람만 남아 있어 거침없이 무기 등을 빼앗은 뒤 학교와 군청의 부속건물, 민가 13동을 태우고 무주 방면으로 퇴진하였다.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를 공격하였다. 그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 동북 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 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청산·옥천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하고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 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후일을 계획하다가 경술국치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 조기래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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