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068
한자 李錫庸
이칭/별칭 경항(敬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연표보기 - 이석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이석용 거의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이석용 임자동 밀맹단 결성
몰년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이석용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 - 이석용 건국 훈장 국민장 추서
출생지 이석용 출생지 - 전라북도 임실군
거주|이주지 이석용 이주지 - 전라북도 진안군
학교|수학지 이석용 수학지 - 전라북도 임실군
배향 진안 이산묘 영광사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호남 창의 대장

[정의]

개항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1907년 9월 진안 마이산에서 거의하여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을 결성하고 진안 지역을 무대로 항일 투쟁을 하였다. 1912년에는 비밀 결사를 결성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할아버지는 승문 박사(承文博士) 이태환(李泰煥)이고 아버지는 이봉선(李鳳善)이다.

[활동 사항]

이석용(李錫庸)[1878~1914]은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자 그해 음력 8월 말 이석용은 왜적을 물리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의병의 길로 나섰다. 이후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진안 상이암(上耳庵)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등 준비하는 가운데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석용은 1907년 9월 그동안 규합된 동지들을 진안 마이산으로 집결시키고 창의 고천제를 거행하였다. 마이산 용암 위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이라 써 붙였다. 이석용은 의진의 명칭을 호남 창의소라고 했으며 자신은 호남 창의 대장이라 하였다. 이들은 대오를 편성한 후 진안읍을 공격하여 분파소와 우편물 취급소, 일본어 통역의 가옥 등을 불사르고 통신선을 절단하였으며 일진회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하였다. 이석용은 용담에서 활동 중이던 김동신 의병 부대와 합진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잘 진행되지 않았고 와중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임실, 진안, 장수, 운봉, 남원, 곡성, 정읍 등 주로 전라도 동부 산간 지역을 무대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례로 이동해 온 고광순 의병 부대와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이석용은 1909년 음력 3월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일제 군경의 탄압이 갈수록 강화되었고 의병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 8월 나라를 잃은 후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후 1912년 겨울 그는 국가를 되찾기 위해 비밀결사를 결성, 중국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의병 활동 때에 군량과 자금을 보내준 정동석을 찾아갔다가 밀고를 당하여 체포되었다. 1913년 겨울 임실에서 한인 형사 김대정(金大亨)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소위 살인·방화·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4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호남 창의록』, 『불망록』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진안 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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