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067
한자 宋秉璿
이칭/별칭 문충(文忠),화옥(華玉),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6년연표보기 - 송병선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05년연표보기 - 송병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 - 송병선 건국 훈장 국민장 추서
출생지 송병선 출생지 - 대전광역시 회덕
묘소 송병선 묘소 -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 용동 서원
배향 진안 이산묘 영광사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본관 은진(恩津)
대표 경력 사헌부 대사헌

[정의]

진안 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개항기 순국지사.

[개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송병선은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십조 봉사(十條封事)를 올리는 한편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시호는 문충(文忠).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고 송면수(宋勉洙)의 첫째 아들이고 참의 송달수(宋達洙)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활동 사항]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대전광역시 회덕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882년에 공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에서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였다. 송병선고종을 알현하여 을사 5적의 처단할 것, 현량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 봉사를 올렸다. 이어서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에게 속아서 납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그해 음력 12월 30일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송병선은 황제와 국민과 학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았는데 유서에 을사 5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무계만집(武溪壹輯)』,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연재집(淵齋集)』이 있다.

[묘소]

1914년 충청북도 영동군 문충사(文忠詞)에 배향되었는데 1970년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으로 이전되어 용동 서원(龍洞書院)이라 불린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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