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순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066
한자 高光洵
이칭/별칭 광욱(光旭),광순(光珣),광순(光詢),서백(瑞伯),녹천(鹿川)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오경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8년연표보기 - 고광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고광순 나주에서 을미 의병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고광순 창의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고광순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 거병
몰년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고광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47년 - 고광순 진안 이산묘 영모사 배향
추모 시기/일시 1958년 - 고광순 전라남도 연곡사 순절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62년 - 고광순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69년 - 고광순 전라남도 구례군 포의사에 배향
출생지 고광순 출생지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묘소 고광순 묘소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월봉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 대장

[정의]

진안 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개항기 의병장.

[가계]

본관은 장흥(長興). 아명(兒名)은 광욱(光旭), 일명 광순(光珣·光詢). 친아버지는 고정상(高鼎相)이다. 사위는 항일 투사로 유명한 기산도(奇山度)이다.

[활동 사항]

고광순(高光洵)[1848~1907]은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났다. 의병장으로 진안 이산묘영광사에 배향된 인물이다.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일으키자 고광순은 전라도 각 읍에 격문을 보내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모집함과 동시에 좌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나주를 본영으로 하여 의병을 모집했지만 일본군이 나주로 집결하기에 다시 본진을 광주로 옮겼다. 이후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상하던 중 정부가 파견한 선유사의 해산 권고에 따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1905년(광무 9)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강탈당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되자 이에 저항하고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듣고 고광순고제량(高濟亮)과 함께 최익현의 의병에 합류하고자 하였지만 이미 최익현은 패하고 서울로 압송된 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재기를 노리던 고광순은 1907년 1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고제량·고광훈(高光薰)·고광채(高光彩) 등의 족친들 및 윤영기(尹永淇)·박기덕(朴基德) 등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2월 남원 의진을 이끌던 양한규(梁漢圭)로부터 남원성 탈환을 위한 연합작전 제의를 받게 되었다. 이에 호응한 고광순은 휘하 의병들을 이끌고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양한규가 진위대와의 접전 중 전사하면서 남원 의진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광순 휘하의 의병 부대는 할 수 없이 비홍치(飛鴻峙)를 넘어 담양군 창평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장성의 기삼연(奇參衍)·능주의 양회일(梁會一) 등과 연합하여 4월 화순읍을 점령함으로써 주민들의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구례 연곡사(燕谷寺)와 지리산 문수암(文殊庵) 일대를 거점으로 군사훈련 및 군량을 보충하면서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제작하여 사기를 진작하였다. 그 후 지리산을 거점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동년 10월 전개된 일제 군경의 대대적인 의병 토벌 작전으로 인해 연곡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묘소]

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월봉산 기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47년 진안 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되었다. 1958년 전사한 연곡사 인근에 순절비가 건립되었으며, 1969년에는 순절을 기리기 위해 포의사(褒義祠)가 세워졌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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