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944
한자 李尙眞
이칭/별칭 천득(天得),만암(晩庵),충정(忠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연장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14년연표보기 - 이상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5년 - 이상진 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이상진 사헌부 지평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4년 - 이상진 사간원 정언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8년 - 이상진 이조 판서, 우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90년연표보기 - 이상진 사망
활동 시기/일시 1695년 - 이상진 청백리에 녹훈
거주|이주지 이상진 거주지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연장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한계 서원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의(全義)
대표 관직 판중추부사|우의정

[정의]

조선 후기 진안에서 활동한 문신·학자.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천득(天得), 호는 만암(晩庵). 시호는 충정(忠貞). 증조할아버지는 부윤 이정란(李廷鸞)이고 할아버지는 이종길(李宗吉)이며 아버지는 참봉 이영선(李榮先)이고 어머니는 참판 민여임(閔汝任)의 딸이다. 자손으로는 이우하(李宇夏)가 있다.

[활동 사항]

이상진(李尙眞)[1614~1690]은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52년(효종 3)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국가의 제반 사항을 논리정연하게 논평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1654년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당시의 시사를 여러 차례 직언하였다. 헌종 때에는 이조 참판, 대사간을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당시 영남에서는 대동법(大同法)이 아직 시행되지 않아 정무가 매우 번거로웠다. 감사로 부임하여 대동법으로 일어난 송사 판결을 신속하고 조리 있게 처결해 송옥(訟獄)을 종식시켰다. 우수한 인재를 뽑아 쓰고 탐관오리를 숙정하고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 칭송이 도내에 자자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 이조 판서,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결과 김익훈(金益勳), 이사명(李師命) 등의 보사공신추록(保社功臣追錄)에 대해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의견이 맞지 않아 추록 심의에 불참하고 면직을 청했으나, 윤허 받지 못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1689년 왕비의 폐비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이에 관한 소를 올리는 자는 대역죄로 다스리겠다.”는 지엄한 왕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폐위의 부당함을 간언하다가 종성·북청·철원 등지로 귀양을 갔다. 이후 소결(疏決)로 용서되어 부여에 있는 옛집에서 우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숙종은 과거를 후회하고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진안지』에서는 진안군 진안읍 연장리에 살았고, 훈련대장 전동흘(全東屹)과 친구였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1695년 청백리(淸白吏)에 녹훈되었다. 전주장보 서원(章甫書院)에 배향되었고, 1708년 북청에 있는 이항복(李恒福)의 사당에 함께 제사지내게 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한계 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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