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군 인민 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33
한자 鎭安郡人民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단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55년 7월연표보기 - 진안군 인민 위원회 설립
성격 좌익 행정 기구

[정의]

6·25 전쟁 당시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 있었던 민간 자치 기구. .

[설립 목적]

진안군 인민 위원회는 북한이 진안군의 행정 지배와 통치를 위해 설립하였다.

[변천]

진안군 인민 위원회는 북한군이 진안을 점령한 7월 22일 이후에 조직되었다. 인민 위원장은 진안군 단양리 출신의 김병철이 맡았고 자위대장은 진안면 구룡리 출신의 전금생이 맡았다. 다른 위원들의 명단은 확인되지 않는데, 수복 이후인 1950년 10월에 인민 위원회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부귀면 정곡리 주민 양재춘 등 5명이 학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안군 면 단위 인민 위원회 조직의 전체적인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백운면에서는 백운면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노촌리 출신 김팔바우[김옥년]가 면당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팔바우는 전쟁 이전에 이미 남로당에 가입해서 활동하던 좌익 인사였다고 한다. 이 외에 최○○·김○○ 등이 백운면 인민 위원회에서 활동했지만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백운면 인민 위원회도 7월 하순부터 농지 개혁과 화폐 개혁[북한 화폐인 인민폐 사용]을 실시했고, 남쪽 전선에 투입하기 위한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의용군에 지원하면 대학까지 보내 준다는 선전에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고, 우익 인사의 집안에서는 피해를 우려하여 지원하기도 했다.

유엔군과 국군의 공격이 시작된 9월 28일 전후에 전라북도 대부분 지역의 인민 위원회는 전라북도당의 지시에 따라 산악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진안 지역에서는 부귀의 운장산, 백운의 선각산덕태산, 장수의 팔공산 등으로 입산한 좌익 세력의 규모가 컸다. 특히 백운 지역은 장수의 팔공산으로 넘어가는 산악 지역으로 빨치산들의 활동이 장기간 이어졌고, 마을에서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운면 하미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 중 10여 명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진안군 인민 위원회는 7월 22일 이후 행정·치안 업무를 담당할 조직을 정비하였고, 7월 하순부터 농지 개혁·화폐 개혁·의용군 모집 등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진안군 인민 위원회는 9월 하순에 후퇴한 이후에는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현황]

진안군 인민 위원회의 구체적인 조직과 인적 구성은 현재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진안 지역은 교전이 심했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좌우 대립에 의한 피해가 적은 지역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진안군 인민 위원회의 활동이 진안 지역 사회에 큰 균열과 갈등을 초래한 것 같지는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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