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대가 세워지는 노채 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022
한자 -魯彩-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개설]

노채 마을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에 있는 민속 신앙이 살아 있는 마을이다. 노채 마을은 원래 전라북도 용담군 이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노양리·보성리·괴정리 각부를 병합하고, 노양리와 보성리의 이름을 따서 노성리라고 하여 진안군 안천면으로 편입되었다. 노채 마을노성리에는 노채·상보·시장·하보·회곡[저실] 등 5개 자연 마을이 있었는데 이 중 상보 마을·하보 마을·시장 마을은 용담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어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노채 마을의 주산(主山)은 마을 동남쪽의 국사봉 줄기에서 흘러온 장군석 맥이고 그 기운을 받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우백호는 마을 동북쪽의 형제봉 줄기인데 이 맥은 면소재지까지 흘려 내려와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좌청룡과 안산(案山)은 국사봉 줄기가 갈티골을 휘돌아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산에 둘러쌓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풍수의 형국론에서 모든 땅은 생명체로 은유되고 해석된다. 형국론은 땅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땅에 영성을 부여하고 인간다운 생명성을 인정함으로써 이용과 소유, 또는 정복과 폐기의 공간이 아닌 인간과 땅이 주고받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귀한 삶의 실체가 되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과 마을에 풍수 형국의 이름이 붙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노채 마을은 마을을 중심으로 양쪽 계곡에서 물이 흘러 마을 앞에서 합류하는 형세를 이룬다. 마치 배와 같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배터라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전형적인 배형국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배형국인 마을 터에서는 배가 안정되게 운행하기 위해서 돛대를 세우게 되는데, 노채 마을 역시 2개의 짐대가 세워져 돛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짐대는 가늘고 긴 나무나 돌 윗부분에 새를 한두 마리 올려놓고 단독으로 세우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나 신성한 장소에 세워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신앙화된 민속 신앙물이다. 짐대는 진대·거오기·수살막이대·까마귀·철통·솟대·솔대·별신대·영동대·화줏대·거릿대·오릿대·볏가릿대 등의 명칭으로도 전해진다. 짐대는 일반적으로 마을 액막이[마을 수호·화재 예방·풍농·풍요·기자 등을 위해서 세우는 짐대]의 목적을 위해 세워지거나, 마을의 행주형 지세를 보완하기 위하여 세워지거나 급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기도 한다. 노채 마을의 경우는 풍수적으로 배형국이기 때문에 짐대가 세워졌다.

노채 마을은 배형국이라고 하여 마을에 샘을 파거나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샘을 파면 배 바닥을 구멍을 뚫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배형국인 마을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경우이다. 배형국 마을의 지형은 물가와 가까운 마을로서 지형이 충적층에 해당된다. 충적층에서 우물을 팔 경우 인근에 있는 냇가 물이 스며들기 때문에 식수로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물질로 인하여 오염될 가능성이 높고, 혹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하다가 전염병이 나돌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책일 것으로 여겨진다. 노채 마을에서는 30여 년 전에 마을의 두 군데에 짐대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이는 돛대 역할을 통해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입구에 물이 합류하는 곳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는 합수(合水) 지점을 염두에 두고 심은 것으로 보인다. 즉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실제로 큰물에도 침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느티나무에서 약간 위쪽에 1기의 짐대가 있고, 마을 한가운데쯤에 또 다른 1기가 세워져 있다. 그 모습은 밤나무 기둥 위에 Y자 가지를 올려놓고 세 지점에 3마리의 새를 만들어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새를 ‘오리’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 짐대가 세워진 길가를 ‘짐대 거리’라 부른다.

[노채 마을 유래와 의미]

노채 마을은 약 350~400여 년 전에 의성 정씨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 역사를 약 400년 정도로 짐작하는 것은 마을에 터를 잡은 정씨 선산이 저실 마을 뒤쪽 산에 있는데 그곳에 13대조 묘가 있고 마을 앞쪽으로 9대조 묘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의성 정씨가 많이 살았고 몇 사람의 천석지기가 나올 정도로 부촌이었다 한다. 광산 개발의 수익도 한몫 했다고 한다. 마을에 광산 개발이 한창일 때에는 ‘진안의 한량이 다 모였다’고 할 정도로 노채 마을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마을에 대학생이 서너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의성 정씨 이후에는 단양 우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각성바지로 의성 정씨(丁氏) 5호, 정씨(鄭氏) 3호, 진주 강씨 1호, 김해 김씨·금녕 김씨 5호, 창녕 성씨 2호, 진주 소씨 1호, 단양 우씨 3호, 순응 안씨 1호, 해주 오씨 1호, 전주 이씨·성주 이씨 6호, 나주 임씨 1호, 인동 장씨 2호, 안양 조씨 1호, 청주 한씨 4호, 장수 황씨 1호, 구씨 1호, 손씨 1호, 유씨 1호, 최씨 3호 등이 살고 있다.

노채 마을은 노채(魯彩)·노촌(魯村)·노산(魯山)·노원리 등으로 불리는데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일설에는 예전에 이곳에서 놋그릇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풍수지리상 배형국이기 때문에 배를 젓는 데 필요한 ‘노(櫓)’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노는 물을 헤쳐서 배를 나아가게 하는 기구인데 단단한 나무의 아래 끝을 다듬어서 만든다. 마을의 모든 명칭에 ‘노’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이런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노(櫓)’에 해당하는 음이 후에 노(魯)로 한자화 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노채 마을 입구 오른쪽에 조그마한 개울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 노산정(魯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노산정은 30여 년 전에 세워졌는데, 자연적인 경관을 고려하여 세워졌으며 위치상 비보적인 기능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노채 마을은 냇가를 경계로 위뜸과 아래뜸으로 나누어지며 위뜸 위쪽에 본래 마을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와 조각이 나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구터’라 부르고 있다.

[단지봉 화재막이]

과거 노채 마을에서는 화재가 심했다고 한다. 옛날에 마을에 큰 불이 났을 때 산과 들이 모두 불에 탔지만 유일하게 단지봉 정상 부근만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영험한 기운이 단지봉에 감돈다고 여긴 한 스님이 단지봉에 올라 단지를 묻고 2월 초하루에 제를 지냈다. 이후 화재가 줄었다고 하여 단지봉에서 화재막이 제를 지내게 되었다. 노채 마을 산신제는 정월 열 나흘날 저녁에 다래골에 있는 2칸짜리 산신당에서 1차로 지내고, 마을에 돌아와 ‘방아실’이라 불리는 곳에서 제를 지냈다고 한다.

노채 마을 인근에 있는 괴정 마을에서도 삼월 삼짓날에는 화산이 비치는 골짜기 사이에 단지를 묻고 물을 붓고 술도 부으면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 소금을 묻으면서 화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원했다. 마을 사람들은 소금도 화재막이로서 기능을 담당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노채 마을은 지금도 2월 초하룻날 단지봉[단지를 엎어 놓은 모습]의 화재봉 아래에서 굿을 친다고 한다. 이때 단지를 묻는데 그 단지 속에는 각 면에 동(東)·서(西)·남(南)·북(北)의 글자가 써진 목침이 들어 있다. 제삿날에 주민들이 단지 속에 물을 길어다 부으면 목침이 떠오르는데 그 목침을 보고 그해 농사의 길흉을 점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남(南) 자가 위로 보이면 남향(南向)은 화(火)를 뜻하니 가뭄이 들거나 화재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북(北)은 수(水)를 뜻하니 비가 많이 오고 물이 풍부하여 풍년이 들 것을, 동(東)은 재환이 닥칠 것을, 그리고 서(西)는 태풍이 불거나 바람이 많아서 해를 입게 될 것이라 보는 것이 농점(農占) 신앙이다. 단지봉에서 내려오면 짐대에 상을 차리고 제를 지내는데, 이때 제주는 이장이 맡는다.

[노채 마을의 돌탑과 구지법]

노채 마을의 또 다른 신앙물로 상당한 규모의 돌탑[돌을 둥그렇게 쌓은 것]이 있다. 옛날 마을 위쪽으로 서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를 베자 마을 사람들이 죽는 등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논을 정리하면서 탑이 없어지자 탑을 없애버린 사람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다시 탑을 세우고 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진 상태로 있다.

그런데 풍수학자 최창조는 이 탑을 노채 마을 뒷산의 산세가 좋지 않아 그 기(氣)를 누르기 위해서, 진압(鎭壓)을 위해 세운 것이라는 해석을 한다. 즉 마을로 내려오는 엄뫼[母山]가 있는데 또 다른 맥[좌협(左脇)]이 엄뫼를 옆에서 심하게 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좌협의 끝 부분에 돌탑이나 선돌을 세워 진압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병든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있듯이 풍수에서는 병든 땅을 치료한다. 이것을 구지법(求地法)·의지법(醫地法)이라고 한다. 가령 마을이 연화부수형이면 물길이 막힘 없이 흘러간다. 그래서 물이 지하로 침투하여 마을에 흩뿌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연화도수형에서는 강력한 장애물이 강의 물기를 막기 때문에 물이 지하로 침투하여 장기를 뿜어낸다. 물이 오염된 상태에서는 질병이 심각하게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천변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수종을 골라 숲을 조성하는 일이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인데, 이것이 현대적 풍수요, 구지법이기도 하다. 최근에 노채 마을 입구 노산정 옆에는 새롭게 돌탑을 세웠다.

[노채 마을, 생명의 땅]

노채 마을은 많은 변신을 하고 있으며, 역사와 문화를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화재막이 행사인 단지봉에서의 제를 ‘단지봉 축제’라 하여 그 전통을 잇고 있는 작업이 그것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금을 캐던 갱도를 활용하여 친환경 농법에 의한 머루주를 생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친환경을 표방한 사업인 ‘전라북도 청정 농산물 테마 파크’, ‘으뜸 마을 가꾸기 서업’, ‘유기농 밸리 100’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런 사업들을 마을 공동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해마다 정월 보름날이면 마을 공터에서 이루어지는 달집태우기 행사를 개최하고, 8월 첫날을 ‘마을의 날’로 지정하는 등 마을의 단합을 도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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