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016
한자 自然-調和-下草-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개설]

하초 마을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월평리에 있는 자연 친화적인 마을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자리 잡은 마을로 마을 입구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 숲 내에는 돌탑과 선돌이 비보 풍수적 역할을 하고 정월에 당산제를 지내는 마을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르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하초 마을과 인연]

1990년대 초반 무렵으로 생각된다. 서울 대학교를 사직하고 우리나라 전국을 다니며 풍수를 공부하던 최창조로부터 전화가 왔다. KBS 방송에서 ‘풍수’를 주제로 한국의 미(美) 촬영을 한다고 하면서 전라북도 진안 지역 전통적인 마을 몇 곳을 안내해 줄 것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한국의 미’ 프로그램 주제가 이제는 풍수 영역까지 넓혀졌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어떤 마을을 안내해야 할 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진안 지역을 소상하게 답사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민이 깊어졌다.

몇몇 마을을 생각하던 끝에 그 당시에 진안의 하초 마을, 율현 마을, 종평 마을을 안내하게 되었고, 산골 마을이 방송이 나간 후에 얼마나 유명세를 탔는지 모른다. 특히 하초 마을이 그러했다. 이후 하초 마을을 무던히도 소개하게 되었다. 하초 마을 숲을 대상으로 석·박사 논문이 다수 나오기도 했다. 특히 하초 마을을 대상으로 하여 노르웨이의 농업 대학교에서 홍선기가 ‘Landscape and Meaning’란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으며, 2005년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마을 숲 부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하초 마을 유래 및 풍수]

하초 마을진안군 정천면정자천이 마을 앞을 휘돌아 반달꼴을 이루며 냇가에 들이 생겼으므로 월평리에 속하는 자연 마을이다. 하초 마을은 조선 중엽에 도선 국사가 마을의 뒷산을 보고 마치 말이 풀을 뜯는 형국과 같다 하여 띄엄띄엄 있는 농가를 이름 하여 상초(上草), 중초(中草), 하초(下草)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중초 마을은 없어지고 상초와 하초 마을만 남아 있다. 예전의 길목은 전라북도 전주 지역에서 무주로 가는 길목으로 사람들이 왕래가 빈번하였던 곳이었다고 한다. 근처에 돌이 많아 말을 타고 가다 말이 넘어졌다 하여 ‘망궁글’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하초 마을, 아래 새내[下村, 下草川]는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성씨는 해주 오씨로 알려졌으나 입향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은 광산 김씨, 밀양 박씨, 최씨, 정씨 등이 각성바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는 용담댐 수몰민이 마을 입구 숲 앞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하초 마을 숲]

하초 마을 입구에는 크고 아름다운 마을 숲이 있다. 마을 숲이란 자생하여 이루어진 산림이나 목재를 이용할 목적으로 가꾼 단순한 산야의 일반적인 숲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마을 숲은 마을의 역사, 문화, 신앙 등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보호 또는 유지되어 온 숲을 말한다. 그래서 마을 숲은 다음의 계기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몇몇 사람들이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떤 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 입구가 허(虛)하여 어떤 방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렇다고 자리 잡은 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굳이 가고자 하지 않았다. 몇 명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큰 화재가 나서 마을이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화재가 발생한 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마을을 황폐하게 된 원인이 밝혀진다. 마을 입구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라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심기로 결정한다. 빨리 자라고, 튼튼하고, 바람을 막아낼 수 있는 수종을 골라 심는다. 될 수 있으면 적게 심어도 효과가 날 자리를 골라 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수구(水口)가 좁은 곳을 선택하여 심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나무 심기를 하면서 보호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화재가 줄고 별 걱정 없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일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마을 숲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큰일이었다. 그래서 마을 규칙을 만들고 서로 감시했지만 훼손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방책을 생각해 내게 된다. 그것은 마을 숲을 공동의 소유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신앙성과 신성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마을 숲의 땔감을 가져다 쓰면 죽는다거나 병신이 된다거나 하는 신성성과 함께 여기에 제를 모시면 마을이 평안하고 마을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부가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숲이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 숲은 마을 사람, 마을 사람들의 인식과 관련지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숲의 개념은 마을 사람들이 한 그루를 마을 숲이라 인식하면 마을 숲으로 생각하여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을 숲의 개념 중 중요한 점은 1차적으로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숲의 변화 과정은 마을 사람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또한 마을 숲의 개념 중 중요한 점은 비록 한 그루의 나무라 하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마을 숲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을 숲이 실제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신앙성과 신성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초 마을 숲은 마을을 외부로 부터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다. 마을의 뒤와 양 옆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장풍의 형세를 유지하고 있다. 수몰민이 마을 입구에 이주하기 전까지는 마을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하지만 앞쪽이 문제이다. 가려 주는 둔덕이 전혀 없어 허전한 분위기를 마을 전체에 밀어 넣고 있는 형세이다. 이런 경우 마을 앞쪽에 비보책으로 마을 숲을 조성하게 된다. 풍수 지기론에 의하면 그것은 기(氣)가 흩어져 나가는 것을 방비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마을 숲은 외부로 마을의 복이 흘러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바람을 막아 주어 화재막이 역할도 한 듯하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허하기 때문에 숲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하초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이주하여 새로 형성된 집 때문에 마을 숲 경관이 훼손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마을 입구 땅이 마을 소유였기에 그나마 수몰민을 기꺼이 안아 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멀리 떠나지 않고 고향 가까이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하초 마을 숲은 대부분이 활엽수이다. 그 수종은 매우 다양한데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팽나무, 굴참나무, 개서어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그리고 리기다소나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초 마을 숲은 여름이 되면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일제 강점기 때에 배를 만들기 위하여 마을 숲의 크고 좋아 나무가 베어 버렸더니 연이어 마을에 불이 나자,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다시 심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 아름드리로 남아 있는 나무는 일제 강점기 당시 요행이 베어지지 않은 쓸모없는 나무가 성장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숲을 가리켜 ‘새내 숲’이라 이라고 부른데, ‘새내 숲’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경찰이 진안 일대 마을을 다 뒤지고 다녔는데, 이 마을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고 해서 이른 말이라고 한다. 이러니 마을 숲을 조성하고 마을이 피해를 보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행운 아닌가.

[하초 마을 신앙]

본래 하초 마을에서는 옛길에 위치한 당산나무, 돌탑, 선돌에 제를 모셨다. 마을 한가운데로 새마을 사업 때 길을 내게 되었는데, 이를 흔히 ‘새마을 길’이라 부른다. 그런데 길을 낸 후 마을에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하자 그 길에도 역시 돌탑과 선돌을 세워 놓았으나 그곳에서는 제를 지내지 않는다. 돌탑 옆에는 자연석으로 된 거북이 있다. 거북은 흔히 장수와 복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외에도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가령 거북이 수신(水神)이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해 준다고 하여 마을 입구에 세워 놓아 화재 막이 역할을 하거나 풍수적으로 비보(裨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곳 하초 마을 거북은 마을에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거북의 꼬리가 마을을 향하여야 복이 있다고 하여 거북의 머리는 마을 앞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먹이를 먹고 마을 쪽으로 분비물을 내놓거나, 알을 낳게 되면 마을에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는 신앙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초 마을과 마주한 상초 마을과 거북 머리 방향을 두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하초 마을의 돌탑은 본래 길이었던 곳 양쪽 2기는 오래 전에 쌓여진 탑이고, 새마을 운동 때 새로운 길을 낸 다음 마을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고 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하초 마을 돌탑은 마을의 당산이자 수구(水口)막이 역할을 한다.

하초 마을 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저녁 무렵에 모신다. 하초 마을 옛길에 위치한 당산나무, 돌탑, 선돌에 제를 모신다. 마을 회의에서 제관(祭官)을 선정한다. 제주는 선정된 그날부터 제를 모시는 날까지 금기를 지킨다. 30여 년 전에 제주를 맡은 사람이 연이어 아들 둘을 출산하자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정성스럽게 모셔 삼신이 점지해 준 것이라고 믿는다. 제를 모시는 날 오전에 한지를 꽂은 금줄을 쳐 놓고, 황토를 돌탑 주위와 앞에 조금씩 뿌린다. 제물은 제관과 부인이 장만하여 제장(祭場)으로 가져 온다. 제주는 대나무 살로 만든 등(燈) 2개를 각각 선돌에 달아매고, 돌탑 앞에 화선지를 깔고 제물을 정성 드려 올려놓는다. 제물로는 대추, 밤, 곶감, 미역, 포, 채, 김, 밥 등을 준비한다. 2개 등과 돌탑 앞에도 촛불을 켜는 것으로 제가 시작된다. 제는 제물 진설 뒤에 헌주, 재배, 소지, 헌식 음복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는 마을 가구 수만큼 준비하여 올린다. 마을 사람들의 소원과 건강을 기원한다. 제가 끝난 후 마을 회관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마을의 대소사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마을 총회인 것이다.

마을 숲을 통과하여 마을 중심에 다다르면 거대한 노거수가 나타난다. 그 노거수에 정월 초이렛날 고목제란 제를 모신다. 정월 초엿새 날 부인들이 집집마다 각기 성의대로 팥과 쌀을 걷어 이렛날 아침에 팥죽을 끊이고 저녁 무렵이면 마을 가운데 고목에 와서 고목제를 지낸다. 고목제이지만 팥죽제와 같이 팥죽만으로 제물을 준비한다. 팥죽을 함박에 퍼서 고목나무 앞에 놓고 촛불을 켜 놓고 개인이 각기 소지를 올린다. 고목제를 지내는 사연은 예전에 나무 위에 올라가 놀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이 있고, 나무하러 산에 간 아들 삼형제를 잃는 일이 발생하면서부터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하초 마을 비보 풍수]

조상들은 풍수와 지리가 완벽한 자리를 찾아내는 술법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당의 조건이 부족한 터를 인공적으로 보충함으로써 제대로 된 삶터를 가꾸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마을 숲, 돌탑, 선돌, 거북 신앙은 하초 마을에 터 잡아 살아왔던 마을 사람들의 대동적 공동체를 추구했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증표이다. 어떻게 보면 하초 마을은 풍수적으로 대단히 불안전한 땅인지 모른다. 불안전한 땅을 명당화 시키기 위하여 마을 숲을 조성하고 거기에 더 나아가 돌탑을 쌓고, 선돌을 세우고, 거북을 조성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하초 마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상적인 마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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