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1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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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으로 민족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활동한 운동가.
[개설]
독립운동을 실천해 나가는 방법으로는 무장 투쟁·실력 양성·외교 독립론이 있었고, 정세의 변화에 따라 독립 전쟁·의열 투쟁·3·1 운동·노동·농민·학생·문화·형평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서도 전국적인 독립운동 흐름에 동참하면서 지역 문제와 연관되어 노동·농민·학생 운동 등이 독립운동가에 의해 진행되었다.
[3·1 운동 관련 군산 지역 독립운동가]
1910년대 군산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는 3·1 운동과 군산 공립 보통 학교 방화 사건이 있었다. 이들 독립운동은 3·1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군산 지역에서는 박연세(朴淵世)·이두열(李斗悅)·김수남(金壽男)·이남률(李南律) 등이 참여하였다.
군산 지역에서 전개된 3·1 운동은 1919년 3월 5일부터 4월까지 진행되었다. 기독교 학교인 영명 학교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군산 시내 주요 장소를 비롯해 옥구·임피 지역에서도 계속되었다. 당시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는 박연세·이두열·김수영(金洙榮)·강규언(姜圭彦)·김영상(金永祥)·강문호(康文昊)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명 학교 교사 혹은 학생으로 3·1 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아 군산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고 학생들을 규합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들이 체포되자 동료 학생, 시민, 구암 교회 교인 등이 이들의 석방과 국가의 독립과 요구하며 계속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는 인근 옥구·임피 지역에서 노춘만(盧春滿)·이유상(李有祥)·강성원(姜聖源)·최공훈(崔公勳) 등이 이어받아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명 학교에서 진행된 3·1 운동은 군산 공립 보통학교 학생 김수남·이남률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일본인 교장과 교직원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할 수 없게 저지하자 군산 공립 보통 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하고, 1919년 3월 23일 학교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
[1920~1930년대 군산 지역 독립운동가]
1920년대에는 사회 주의 영향을 받아 노동·농민 운동이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진행되었다. 군산 지역에서도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가 유입되어 일부 지식인층과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노동·농민 운동이 1920~1930년대까지 진행되는데 역할을 하였다. 또한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이 군산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1920년대 군산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는 조용관(趙容寬)·김영휘(金永輝)·신언진(申彦眞) 등이 있었다.
조용관은 1920년대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노동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이다. 조용관은 1920년 8월 군산 노동 공제회(群山勞動共濟會)를 창립하였으며, 1924년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動聯盟)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군산 철도 노동회(群山鐵道勞動會) 위원장, 1927년 3월 군산 노동 연맹회(群山勞動聯盟會) 회장에 선임되었다. 조용관은 이러한 노동 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일본인 자본가에 맞서 민족적 차별을 비판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영휘와 신언진은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농민·청년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김영휘는 군산 지역 노동자·농민의 권익 확보를 위한 활동에 정진하였다. 신언진은 1929년 8월 옥구 대야면에서 대야 청년회(大野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 운동을 진행하였다. 또한 1930년 6월에는 군산 철도 노동회(群山鐵道勞動會)를 중심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노동 파업을 지도하는 등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장태성(張台成)·김행규(金幸奎)·김기술(金己述)·박상호(朴相浩)·김영준(金寧俊) 등은 1927년 옥구 소작 쟁의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일본인 지주가 소유하고 있던 이엽사 농장(二葉社農場)의 소작료가 지나치게 높아 소작인들의 생계에 직접적 타격이 되자 소작료를 낮춰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이엽사 농장 소작인들과 단합하여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며 소작 쟁의를 전개해 나갔다.
군자금 모집과 관련해서 우재룡(禹在龍)·소진형(蘇鎭亨)은 주비단(籌備團)을 결성한 후 무력 투쟁에 필요한 무기 구입비용을 모집하기 위해 1920년 군산 지역에서 활동을 펼쳤다. 최태경(崔泰卿)은 임시 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하여 지하 조직을 결성 후 군산을 중심으로 1924~1925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임시 정부에 송부하였다.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 단원 조인현(趙仁賢)은 1925년 군산에서 장재 여관(藏財旅館)을 경영하며 군자금을 확보해 일제의 착취 기관을 타격할 준비를 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1922년 4월 9일 옥구군 지하 조직인 국민 회사(國民會社)에 가입한 후 군자금을 수합하여 상해 임시 정부를 지원하였다.
이 외에 독립운동가 이태로(李泰魯)는 1927년 2월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조선 공산당 전북 위원회 옥구 지역 책임자로 해당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고규영(高圭永)은 1932년 5월 옥구의 일본인 농장에서 소작인에게 높은 소작료를 전가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농민 조합을 결성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준호(李濬鎬)는 1943년 10월 문화 중학원(文化中學院) 기숙사 동료들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 항일 투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며 세력을 규합하였다. 또한 강제 입대한 학도병들에게는 일본군으로부터 탈출하여 독립군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며, 항일 투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군산 지역 출신 국외 활동 독립운동가]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으로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로는 심재순(沈載洵)과 조수완(趙守完) 등이 있다.
심재순은 임피 보통 학교 졸업 후 영명 학교를 거쳐 1925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심재순은 일본인 가나자와[金鐸]가 경영하는 인쇄소 동성사(同聲社)에 취업하여 문선공(文撰工)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이용해 독립운동에 활용하였다. 1927년 11월 옥구 이엽사 농장에서 소작 쟁의가 일어나자 심재순은 도쿄에서 「친애하는 동향 제군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의 항일 의식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한 후 국내에 발송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수완은 1923년 4월에서 1926년 2월까지 옥구 축산 협동 조합(沃溝畜産協同組合)에 근무하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1926년 2월 7일 상해로 망명하여 중앙 군관 학교를 졸업한 후 북경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의 책임을 지고 중국 실업 은행권(中國實業銀行券) 은(銀) 이천 원(元)을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