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389
한자 天主敎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영춘

[정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진안 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순교자]

진안 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한 곳은 충청남도 금산과 인접한 용담 지역이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 초기부터 충청도 신자들이 이주하여 살거나 잠시 머무르는 곳이었는데, 이들 중에서 순교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기록상으로 가장 먼저 용담에서 생활한 천주교 신자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진 못했지만 순교의 마음으로 살다간 김풍헌[토마스]이다. 그 후로는 용담에서 살다가 1827년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13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1839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정태봉[바오로]이 있다. 한편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많이 체포된 곳 중의 하나로 용담을 꼽을 수 있으며, 이독심[아우구스티노] 등이 밀고로 체포당하였다.

또한 병인박해가 진행 중이던 1868년에는 용담 머리골에 살던 송 가롤로가 여산 포교에게 잡힌 후 여산옥에서 병사(病死) 했고, 박운겸 역시 용담 머리골에서 살다가 체포된 후 순교하였다. 한편 용담에서 거주했던 강영원[바오로]은 전라남도 나주에서 잡힌 후 백지 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하였다.

김풍헌 토마스는 조선 시대 면(面)의 행정을 책임 맡은 풍헌(風憲)이어서 김풍헌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충청도 청양 출신이며 풍헌이 된 것은 같은 고을에 사는 사람들의 추천에 의해서였는데,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도 그 일을 계속 맡았다. 1796년에 청양 관아로 압송 된 후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사형 언도를 받았지만 형이 집행되기 전에 청양 현감이 파면되고 새 현감이 오면서 그는 고을에서 추방되었다. 그 뒤 부여, 금산, 고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1801년 박해가 심해지자 가족을 데리고 진안 용담 안고개[한고개]로 들어와서 살았다. 김풍헌은 여기서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정태봉 바오로[1796~1839]의 어릴 때 이름은 태보였으며, 관명(冠名)은 만보이다. 충청도 덕산 양인(良人)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 베드로가 그의 사촌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5촌 당숙 집에서 자랐으며, 1824년경에는 내포 지방을 떠나 용담으로 이사하였다. 1827년 어느 날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에게 체포되어 용담으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후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13년간 옥고를 치르고 1839년 5월 29일 전주 숲정이에서 4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이독심 아우구스티노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고향에서의 천주교 신자 생활이 어렵게 되자 용담으로 이사하여 살던 중 밀고를 당해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 고문을 당하자 배교했지만 마지막 판결을 기다리던 중 다른 동료들과 함께 배교를 취소하고 1839년 10월 12일 46세의 나이로 장사(杖死)하였다.

송 가롤로는 용담 머리골에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 여산 포교에서 붙잡혔고, 여산옥에서 병사하였다. 나이는 50세였다. 박운겸은 용담 머리골에서 살다가 1868년 10월 10일 김윤문과 함께 여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여산옥에 갇혔다. 김윤문이 옥사한 후 12월에 장대(將臺) 거리에서 순교하였다.

강영원 바오로는 성운이라고도 한다. 본래는 용담 사람이었지만 체포 당시에는 정읍 이문동 임군명[이고나오]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고 있었다. 1871년[신미년] 11월 23일 나주 포교에게 붙잡혀 나주 진영으로 끌려가 옥에 갇혔다. 그때 옥에 함께 갇혀 있던 사람은 유문보와 유치성 등이 있었다. 1872년 1월 나주 무학당에서 태장 30여 대를 맞고 정신이 혼미해지자 영장은 백지 사형(白紙死刑)을 내렸다. 그는 임신년 3월 9일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는 51세였다.

[진안 지역의 천주교 변천]

진안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의 신자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병인박해 이후였으며, 대부분 전라도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로서 주로 이웃하고 있는 고산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천주교 신자촌은 주로 심산계곡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터골[성수면 중길리], 동창[백운면 동창리], 대평리[마령면 한들], 한실골[부귀면 수항리], 널티, 서촌, 방각리[부귀면 신정리], 활목[부귀면] 등이었다. 진안 지역의 천주교 신자는 이주해 온 신자들과 새로 세례 받은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증가하였다. 1876년에는 충청도에서 함응서, 이사순, 이화서, 송사현, 최덕호 등이 박해를 피해 전라도 지역으로 피신하여 어은동 근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878년 9월에는 박중현이 프랑스인 블랑[白圭三] 신부를 경상남도 거창군 적하동에서 용담 양명리[현 진안군 주천면 운봉리] 최 베드로 회장 집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도 진안군 마령면 방각리로 이사와서 살았다. 결국 이것이 진안 지역에 천주교 신자촌인 공소(公所)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2년에는 널티[현 마령면 덕천리 판치]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1883년에 구시울 공소·고산골 공소·양명이 공소·막골 공소·여내골 공소·달거리 공소·가래올 공소·방각골 공소·삼바실 공소·매남이 공소, 1884년에는 모시골 공소[어은동]·동창 공소[백운면]·장승백이 공소[부귀면 장승리], 1885년에는 적내 공소·두남이 공소[부귀 두남리미실 공소[현 봉암리], 1887년에 절골 공소·손실 공소·배골 공소, 1888년에는 고중대 공소[백운면어은동 공소, 1889년에는 대성동 공소·마재 공소, 1890년에는 장재동 공소·한식골 공소[현 수항리], 1891년에는 터골 공소[중길리], 1892년에는 양오리 공소, 1895년에 억이제 공소 등이 설립되었다. 1897년에는 추천리 공소·덜먹이 공소·귀동 공소·반월리 공소·느랏 공소[백운면두원리 공소·안널티 공소가 설립되었고, 1898년에 안서촌 공소·하궁리 공소, 1899년에는 양지 공소·오암리 공소·활목 공소, 1900년에는 수침동 공소·안들 공소·주암동 공소가 설립되어 진안 지역의 천주교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진안 지역에 있던 공소들을 초기에는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담당했는데, 1883년까지는 리우빌 신부가, 1884년부터는 죠스 신부가, 1887년부터는 전주 전동 성당의 보두네 신부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전주 성당이 진안 지역 공소까지 직접 관할하기에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1900년 9월 뮈텔 주교는 진안 어은동에 성당을 세워 진안 지역을 분할하였다.

어은동 성당은 신자들의 기도와 정성을 담아 한옥 양식에 돌 너와를 얹은 양식으로 신축되었다. 그리고 1921년에는 본당을 한들[진안읍 연장리 중평]로 옮겼다. 이후 진안 지역의 성당은 한들에서 진안읍으로 옮겼다가 다시 한들로 옮기는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1941년부터는 진안읍으로 본당을 옮겼다. 이후에도 어은동이나 한들이 본당으로 재설정되기도 하지만, 1985년 한들 본당이 폐쇄된 이후 현재까지 진안읍에만 본당이 있다.

[진안 천주교 현황]

2013년 현재 진안 지역 성당은 진안읍에 있는 진안 성당이 유일하며, 공소는 부귀 공소·동구점 공소·두원 공소·머우내 공소·봉암 공소·소토실 공소·수항 공소·선인동 공소·어은동 공소·오암 공소·장재동 공소·중리 공소·평촌 공소·한들 공소·황금 공소 등 15곳이다. 관할 구역은 진안군 전체이며, 신자는 2,331명으로 진안군 전체 인구의 8.6%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천주교 복지 시설로는 진안 인보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가 있고, 문화재로는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어은동 공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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