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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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友-祈禱-魚隱洞公所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죽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진성 |
설립 시기/일시 | 1888년 - 어은동 공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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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00년 - 어은동 공소에서 어은동 본당으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9년 3월 - 어은동 본당 성전 신축, 준공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0년 10월 29일 - 어은동 공소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미사 봉헌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2년 5월 31일 - 어은동 공소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 |
건물 | 어은동 공소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죽산리 |
성격 | 천주교 공소 |
문화재 지정 번호 | 국가등록문화재 |
[개설]
어은동은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죽산리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로 물고기가 숨은 형상이라고 해서 어은동(魚隱洞)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물고기는 로마교회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던 암호이다. 마을 이름 자체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와 살았던 천주교 신앙 선조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어은동 공소는 2002년도에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통영 대전 중부 고속 도로를 타고 통영 방면으로 주행하다가 장수 나들목에서 내려와 진안 방향으로 국도 26호선을 타고 20여 분 달리면 오천 삼거리가 나온다. 전주에서는 모래재를 넘어 부귀면을 지나 마이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진안읍에 도달한다. 진안읍을 통과하여 장수군 천천면과의 중간 지점에 오천 삼거리가 나온다. 오천 초등학교를 끼고 산길을 4㎞ 남짓 가면 막다른 골짜기에 마을이 나타난다. 하천 차수로는 1차수 하천에 해당하는 깊은 산골짜기의 최상류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다.
[어은동 마을의 공소 형성 과정]
전라북도 진안군과 장수군을 잇는 높이 1,059m의 성수산 북쪽 자락 끝에 있는 어은동 마을은 1888년에 천주교 공소가 설립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1905년에는 성당에 14처를 세우고 뮈텔 주교[조선 교구장] 지시로 여교우들이 앉는 여교우청에 통로를 따로 만들었다. 그 이듬해 다시 성당을 넓히고자 성당 입구쪽 남녀 교우청에 각각 한 칸씩을 신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09년 3월 마침내 너와 지붕 목조 49평의 새 성전을 준공했다.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이 공소 건물이다. 지금은 포장이 되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비포장도로라서 비라도 오면 진흙탕 길이었는데, 100여 년 전이라면 정말 깊은 산골이었을 것이다.
성당이 완공되던 1909년에 김양홍 신부는 성당 사랑채에 영신 학교를 세워 국어, 한문, 수신, 산수 등을 가르쳤으며 1911년에는 성당 앞마당에 학교를 신축하기도 했다. 학교가 신축되던 1911년 어은동 본당 관할 교우 수는 2,117명이었고, 어은동 공소 교우만 520명이나 되는 등 어은동은 진안·장수 지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어은동 본당은 본당 자리를 진안군 마령면 연장리 한들에 있는 한들 공소로 넘겨주고 다시 공소로 편입되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어은동이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있었다는 것도 작용하였다.
이후 어은동 공소는 1947년 11월 송남호 신부를 맞이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하였으나 6·25 전쟁이 나면서 1951년에 다시 폐쇄되어 한들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본당이 1952년 진안읍으로 옮겨가면서 어은동 공소는 진안 본당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25가구 약 40여 명은 모두 천주교 신자들이다. 하지만 현재 공소 건물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미사가 있으며 공소 예절을 할 때나 판공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
중말과 어은동 공소 중간쯤 모싯골[당고개 재] 산 능선에는 천호 성지로 유해가 이장된 이명서 베드로 성인의 묘가 있다. 오천 삼거리 오천 초등학교 옆에는 석고개 성당[평촌 공소]이 있으나 현재는 공소로만 이용된다. 어은동 노인정에서 다리를 건너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마당 위로 왼쪽에 종탑을 둔 너와 지붕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어은동 공소 건물이다.
[어은동 본당 설립 과정]
『전주 교구사』와 『진안 본당 105년사』 등에 의하면, 1876년경 진안 일대에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충청도 등지에서 전라도 산중으로 피난 내려온 신자들이 삼바실, 절골, 모시골, 절번덕이 등에 흩어져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고 어은동 공소도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8년 어은동 공소가 설립된 후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신자들은 점차 어은동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어은동을 비롯한 진안 지역 일대로 전라도의 다른 지역 교우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자수가 현저히 증가하였고, 1888년~1889년에 이 지역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40명에 이를 만큼 교세는 날로 발전하였다.
진안 지역은 신자들의 성실한 신앙생활로 인하여 1897년에서 1898년까지 전주[현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보두네(Baudounet)[윤사물(尹沙勿)] 신부가 관할하던 지역 가운데 신자수와 영세자수가 가장 많았다. 이후에도 신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보두네 신부가 담당했던 12년 동안 냉담 교우[성당에 나오지 않는 신자]가 없었으며, 1886년에서 1900년 사이에 무려 27개의 공소들이 설립되었다.
이에 보두네 신부는 진안을 비롯하여 용담, 장수, 남원, 무주 지역의 많은 공소들을 관할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1900년 9월 뮈텔(Mutel)[민덕효(閔德孝)] 주교는 보두네 신부에게 진안 등의 지역을 전주 본당에서 분리할 것을 제안하였고, 한국인 신부 한 명을 보내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뮈텔 주교는 신설 본당 소재지로 남원읍을 추천했으나, 보두네 신부는 당시 교세로 미루어 남원 지역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어은동 지역에 본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산 능선을 중심으로 주변에 분포한 여러 교우촌들의 중심에 어은동이 있을 뿐더러, 신자수도 많아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유리한 때문이었다.
1900년 9월 뮈텔 주교는 보두네 신부의 뜻에 따라 어은동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파견하였다. 김양홍 신부는 보두네 신부의 관할 구역 가운데 진안을 비롯한 11개 지역 공소를 이관 받아 이를 다시 18개 공소[진안 4, 무주 1, 용담 1, 장수 9, 남원 3]로 나누었는데, 당시 인계받은 신자수는 999명이었다. 이 중에서 삼바실, 모시골, 절골, 절번덕이를 합친 어은동 공소는 신자수가 189명에 이르렀다. 비록 어은동 성당은 본당으로 설립되었지만 행정상으로는 공소로 취급되었다.
어은동 공소의 초기 신자들은 함응서, 이사순, 이화서, 송사진, 이학수, 최덕효 등이었다. 어은동에서는 모시골이 첫 공소였는데, 이학수[바오로] 회장의 집이 공소였다. 김양홍 신부는 1901년 9월에 옛 공소집을 수리·확장하여 너와 지붕 목재 7칸 건물의 성당으로 완공하였다.
1903년 신자수가 1,400명에 이르자 기존 건물에서 미사를 지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어 이듬해인 1904년 음력 정월 초부터 마을 아래쪽에 15칸 크기의 새 성당을 신축하였다. 성당의 목재는 머우내[내오천] 앞산과 장수군 연평리 오리골에서 벌목하여 교우들이 지게로 운반하고, 기둥 재목의 일부는 헌 목재를 구해다가 사용하였다. 1906년에는 성당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고 뮈텔 주교의 지시로 여교우들이 앉는 자리에 통로를 따로 만들었다.
그 후로도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자 1909년 3월 마침내 너와지붕 목조 49평의 새 성당을 준공하여, 같은 해 9월 드망즈(Demange)[안세화(安世華)]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002년 5월 31일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이 공소 건물이다.
[성당의 건축과 특징]
새 성당은 정면 6칸 중 오른쪽 2칸의 일부를 제대로, 나머지는 제의방과 사제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또 왼쪽 1칸은 남녀가 따로 출입할 수 있도록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건물 내부 평면은 ‘아’(亞)자 형식[십자가 모양]을 이루고 있고,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대에 남녀 교우석을 구별했던 표시이다. 제대 뒷벽에는 목조로 된 감실과 목제 촛대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제대를 감실 바로 밑 벽에 바짝 붙여서 설치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붕은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팔작지붕에 너와로 이었다. 너와는 기와용으로 사용하는 얇고 넓적한 점판암이었다. 교우들은 지붕으로 사용할 너와를 구하기 위해 30리나 떨어진 백운면 백암리까지 가서 지게로 날라 왔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목조 건물이 돌로 만든 너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자 교우들은 1967년에 너와지붕을 가벼운 함석지붕으로 바꾸었다가 2000년대 중반에 너와지붕으로 다시 바꾸었다. 이전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반영한 결과였다.
새 성당이 완공되던 당시 진안읍에는 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주지 못했다. 그래서 김양홍 신부는 1909년 2월 이들을 위해 성당 사랑채에 영신 학교(永信學校)를 설립하여 국어, 한문, 수신, 산수 등을 가르쳤다. 설립 당시 학생 수는 30명이었으나 곧 60여 명으로 늘어나자 1911년 9월 성당 앞마당에 학교를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이 영신 학교의 운영은 교육뿐만 아니라 전교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본당에서 다시 공소로]
학교가 신축되던 1911년 어은동 본당 관할 교우 수는 2,117명이었고, 어은동 공소 교우만도 520명이나 되는 등 어은동은 진안·장수 지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1년 어은동 본당은 본당 자리를 진안군 마령면 연장리 한들에 있는 한들 공소로 넘겨주고 다시 공소로 편입되었다. 이후 어은동 공소는 1947년 11월 송남호 신부를 맞이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했으나 6·25 전쟁이 나면서 1951년에 다시 폐쇄되어 한들 본당 공소가 됐다. 그러다가 본당이 1952년 진안읍으로 옮겨가면서 어은동 공소는 진안 본당에 편입돼 오늘에 이른다. 현재 공소 건물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미사가 있으며 공소 예절을 할 때나 판공[고백 성사를 일컬음]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
1915년 6월 김양홍 신부가 제주도로 전임되고, 임시 주임으로 타케(Taquet)[엄(嚴)] 에밀리오 신부가 임명되어 사목 활동을 하는 동안 진안에는 군상 천주당[진안면 군상리], 진안 천주당[진안면 죽산리], 반송 천주당[백운면 반송리] 등 3개의 포교소가 개설되었다.
2대 주임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는 본당의 발전을 위해 전교 전망이 큰 지역으로 본당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우선 1921년 6월 장재동 공소로 옮겨 거처하다가, 1922년 6월 다시 마령면 연장리의 한들 공소로 옮겼다. 한들 공소에 본당 자리를 넘겨주고 공소로 편입된 가장 큰 이유는 어은동이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들에 정착한 후 7월부터 이상화 신부는 박덕화(朴德和) 다미아노의 주선으로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목조 7칸의 성당과 목조 5칸의 사제관을 준공하였다. 1924년 10월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30년에 종각을 세웠다.
이상화 신부가 한들로 본당을 옮길 때 어은동의 일부 신자들도 신부를 따라 한들로 이사하였다. 그때 한들의 박덕화는 이주한 신자들이 농사를 지어 생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논을 구입해 주었다.
1941년 4월 13일 진안읍에 본당이 신설되자 한들 본당의 이기수(李基守) 야고보 신부가 진안읍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한들 본당에는 허일록(許日錄) 타대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기수 신부는 진안읍 군상리 866의 초가를 구입하여 기와 지붕 강당으로 개수하여 사목 활동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2년 말 진안읍의 본당이 폐쇄되어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한편 어은동 공소에도 1947년 11월 다시 본당이 신설되어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진안면과 장수군 천천면 일대를 관할하며 전교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해 어은동 본당은 1951년 2월 폐쇄되고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1951년 4월 허일록 신부 후임으로 한들 본당에 부임한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는 그 이듬해에 진안읍으로 다시 본당을 이전하였다.
김반석 신부는 이기수 신부가 사용하였던 군상리의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했고, 당시 이기수 신부가 매입해 두었던 군하리 전답에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과 각 공소 회장들로 성당 신축 추진 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6년 10월 110평의 성당을 준공하여 1957년 7월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어은동·진안읍·군상리·한들로 본당을 옮기고 그 사이에 진안읍과 어은동에 새로 본당이 신설되기도 했던 진안 지역의 본당은 비로소 ‘진안 본당’으로 정착되었고, 어은동 공소는 진안 본당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진안 본당은 1999년 12월 전기 누전으로 성당이 전소되어 새 성당 건립 공사를 추진하였고, 2000년 10월 29일 어은동 공소에서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미사를 하였다. 또한 진안 성당은 2002년 4월 연면적 600평 지하 1층 지상 1층의 콘크리트 건물인 신축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013년 8월 초에 어은동을 들렀을 때에는 마침 기존의 점판암을 새 점판암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이전의 점판암들에 불량품이 섞여 있었는지 균열이 심해서 비가 새기 때문에 건물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8월 초부터 새 점판암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어은동 공소 앞마당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의 내용 또한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 그 내용 가운데, 1967년에 함석지붕으로 교체한 것이 ‘슬레이트(slates)’라는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 이후의 지붕 교체 과정 역시 생략되어 있다. 여기에서 슬레이트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본래의 의미인 점판암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새마을 운동 이후에 유행이 된 ‘슬레이트 지붕’과 혼동할 수 있다. 차라리 함석지붕이라고 적고, 나중에 너와지붕[또는 점판암 지붕]으로 교체하였다고 밝혀두는 것이 읽는 이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을 것이다. 영문으로 표기하더라도 ‘클레이 슬레이트(clay slates)’라고 적는 것이 점판암이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