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897 |
---|---|
한자 | 七星臺 |
분야 | 종교/신종교,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방곡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용엽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방곡리에 있는 남학(南學) 관련 유적.
[개설]
1895년 남학 교주 및 간부 8명이 순교한 이른바 을미 횡액 이후 남학 교도들이 이곳에 숨어 들어 제단을 쌓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변천]
운장산 남쪽 계곡에 있는 칠성대는 넓은 바위 뒤에 자연석의 제단이 있어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남학 교도들이 봉기하려다 미수에 그쳐 교주와 교인 7명이 처형당하자 남학 교인들이 이곳에 숨어들어 제단을 쌓고 기도하던 장소이다.
[위치]
진안군 부귀면 방곡리에서 임도를 따라 오르다 보면 8부 능선 지점 계곡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9년 전북 역사 문화 학회 자료 조사팀이 운장산 주변 역사와 문화 유적을 조사하던 중 칠성대 주변에서 「칠성대」 각석을 비롯한 「칠성대 영유기」 등 금석문을 찾아내 칠성대의 역사와 문화를 밝혔다.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가 창도한 남학(南學)에 대해 그동안 자료가 없어 연구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때의 조사에서 남학과 관련된 여러 점의 금석문을 칠성대에서 찾아내었다. 그 중 「칠성대 영유기」는 해독이 가능하여 남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생각된다.
[현황]
칠성대는 운장산 서봉에서부터 남쪽 계곡에 깎아 놓은 듯한 반듯한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는 장소로, 예부터 기도터로 알려져 왔고 바위 밑에는 사람이 살던 방 구들장이 남아 있다.
칠성대 암벽에는 「칠성대(七星臺)」, 「산왕단(山王壇)」 암각서와 「칠성대 영유기」, 「우당 김처사 병서」란 2점의 글씨를 얇은 돌에 새겨 바위를 파고 끼워 넣은 것이 있다. 「칠성대 영유기」의 내용은 정 3품 규장각 직각 정인욱(鄭寅昱)의 기문(記文)과 수당 이덕응, 자동 시옹 이송암, 명암 처사 김명봉, 덕산 처사 박성암 등 네 사람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기도처로서 오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던 칠성대는 1895년 남학 교도들이 이 곳을 찾아와 제단을 쌓고 기도한 흔적이 있다. 수당 이덕응이 1926년 자신의 회갑연에 100여 명의 친지들을 이곳에 모아 잔치를 벌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칠성대 영유기」 정인욱의 글에서 “이제 칠성대의 향연에서 그를 따라 놀러온 사람들과 제자와 함께 모모의 글로써 알리고 새겨서 드러낸다”라는 내용을 새롭게 찾아내어 남학 연구에 한 걸음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