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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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喪禮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훈 |
[정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사람이 죽은 후 장사 지내는 예법.
[개설]
상례는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때 수반되는 의례이다. 이는 죽음을 현실로 수용하는 초종례부터 시신을 처리하는 습과 염의 의례,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발인과 매장에 따르는 의례, 상주들이 현실 사회로 복귀하는 매장 후부터 탈상까지의 과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진안 지역에서 행해지는 전통적인 상례는 임종(臨終)-초혼(招魂)-수시(收屍)-염습(殮襲)-성복(成服)-발인(發靷)-우제(虞祭)-담제(禫祭)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연원 및 변천]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유교식 상례는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가 쓴 『사례편람(四禮便覧)』 등과 같은 유교 예법서들의 규정에 따라 행하여 졌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새마을 운동과 「가정의례준칙」으로 그 규범이 간소화되었고, 이후 사회·경제·문화적 여건의 변화로 상례의 여러 절차들이 통폐합되는 등 축소되었다.
또한 상복의 착용 문제나 상례 실행의 많은 부분을 대행하는 장의사라는 전문 직업이 생겨나고, 장례식장과 병원[영안실]을 이용하면서 집집마다 예법이 달라서 ‘가가례(家家禮)’로 통칭되던 지역별·문중별 다양성을 지니던 방식이 전국적으로 규격화되고 있다. 장례 기간도 3년 상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탈상의 시기도 다양화되어 삼우제를 지내고 탈상하거나 사십구재(四十九齋)나 백일재 이후에 탈상하기도 한다.
상복 역시 이전에는 오복 제도에 따라 복인들이 입는 상복의 재질과 봉제법이 각기 달랐지만, 오늘날에는 두건이나 광목으로 두루마기와 띠 정도만 갖춘다. 이것 역시 손수 만들지 않고 장례업체의 기성복을 이용한다. 또한 집안에서 임종을 맞이하던 전통 사회에서는 초상이 나면 상가를 중심으로 가족과 친족,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큰일을 치렀다. 따라서 초상에 대비하여 마을마다 상포계를 운영하여 일손을 도왔으나, 지금은 대부분 부조로 대신하고 있다.
[절차]
상례는 인간의 죽음과 이에 따르는 일련의 절차를 말한다. 상례나 장례는 임종(臨終)을 맞이하면서부터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원강정 마을에서는 임종을 확인하기 위하여 가벼운 누에 껍질을 코 밑에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돌아가시면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도록 하는데, 동쪽은 봄을 의미하므로 봄에 새싹이 올라오듯이 봄의 새 기운을 받아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백운면 정상렴은 대개 코와 입 사이, 즉 인중에 솜이나 종이를 놓아서 움직임을 확인한다고 한다.
임종이 확인되면 사자상을 차리고 초혼(招魂)을 한다. 마령면 전복주에 의하면 마당에 사자상을 차리는데, 밥 세 그릇, 평소에 입던 옷, 물, 짚신 세 켤레를 놓는다. 사자상 앞에서 곡을 한 뒤 그 자리에서 초혼을 부른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아무개가 혼을 부릅니다. 복복복’ 하고 외친 뒤에 물에 밥을 타서 사립문 밖에 버린다. 그리고 평소 입던 웃옷을 사자상의 물에 적신 뒤 지붕 위로 던진다. 이는 가지 말고 오라는 뜻이다. 초혼을 한 뒤에 짚신을 태운다.
다음 수시(收屍)가 진행된다. 시신을 바로잡는 것을 수시라고 하는데, 시신이 굳기 전에 몸이 오므라들지 않도록 반듯하게 하는 것이다. 소렴(小殮)은 시신을 옷과 이불로 싸는 것을 말한다. 수시와 소렴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백운면 유병오에 의하면 임종하면 두 손을 모아서 두 엄지손가락을 묶고, 두발을 반듯이 펴서 발목을 묶으며 저럽[삼]대기를 한 움큼씩으로 시신을 묶어 사다리처럼 만든 후에 시신을 올려놓는 것을 소렴이라고 한다.
이후 호상과 상주를 정한다. 장례를 총괄하는 사람을 호상으로 내세우는데, 예의 법도를 잘 알고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정한다. 상주는 그 집안의 큰아들이 맡되, 큰 아들이 없을 경우는 작은 아들 아니면 큰 손주가 상주를 맡는다.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부고장을 낸다. 마령면 강정 마을의 경우 부고장을 받으면 집에서는 그것을 방으로 가지고 가지 않고 화장실에 꽂아 놓는다. 백운면에서는 부고장을 면사무소 등사기로 밀어서 부고를 내기도 하고 직접 육필로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현금으로 하는 부조가 흔치 않았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창호지 부조를 제일 많이 했다고 한다.
습염(襲殮)은 시신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힌 뒤 관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말한다. 주로 묵향을 삶은 물로 죽은 이의 몸을 씻기고, 이어서 수의를 입히고 예쁘게 단장한다. 수의는 마포로 하는데 이는 땅속에서 쉽게 썩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톱과 발톱 및 머리카락을 잘라 관에 넣어 둔다. 그리고 뼈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곱 매듭을 묶는다. 죽은 이의 입안에 쌀을 넣어 주는 것을 반함(飯含)이라고 한다. 반함이 끝나면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쓰던 물건을 넣어 준다. 입관이 끝나면 명정을 덮는다.
입관이 끝나면 상주들이 상복을 입는 것을 성복이라 한다. 성복을 하기 전에는 상주는 두루마기를 걸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왼쪽 어깨를 배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른쪽 어께가 드러나도록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가 돌아가셨는지를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입관 후 세수하고 머리를 감은 뒤 성복을 한다. 마령면 원강정 마을의 경우 상복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 옷감의 바느질이 밖으로 나오도록 하거나 아예 바느질을 하지 않으며 단을 이을 부분도 밖으로 나오도록 한다. 이를 ‘참최(斬衰)’라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옷감의 바느질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데, 이를 ‘재최(齋衰)’라고 한다.
지팡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대나무로 만들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로 만들어 사용한다. 백운면 정상렴에 의하면 성복은 나흘째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고인이 사흘까지 깨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일 성복(四日成服)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복했으면 상주한테 절을 한다. 성복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주에게 절대 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복을 하고 제청(祭廳)이 마련되면 조문객들이 와성 문상을 한다. 상주는 제청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문상객을 맞이한다. 제청은 마당 가운데나 안방에 마련된다. 상 위에 지방이나 돌아가신 분의 사진을 세워 두고 향불과 촛불을 켜 놓으며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는다. 조문 온 사람들이 술 한 잔을 부어 놓고 절을 올린다.
출상 전날 밤 마을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죽은 이가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밤을 새는데, 이때 상여 놀이를 하면서 상주를 위로한다. 마령면 원강정 마을에서는 상여 놀이를 ‘대어우른다’고 하고, 백운면에서는 출상 전날 하는 ‘빈 상여 놀음’을 대울림이라고 한다.
발인은 관이 장지를 향하여 집을 떠나는 절차를 가리킨다. 관이 방을 빠져 나가기 전에 마당에서 발인제를 모신다. 이를 ‘조전(祖奠)’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당에 상을 차려 놓고, 상주들은 절을 하고 곡을 한다. 마령면 원강정 마을에서는 집사가 발인제를 주도하였다. 관이 나올 때 관을 옮긴다는 축을 읽은 뒤 방안 네 귀퉁이를 찌고 바가지를 깨고서 나온다.
출상 행렬은 명정, 공포, 상여꾼, 상여, 상주, 일가친척 순서로 나가게 된다. 상여가 갈 때 평소 죽은 이가 즐겨 다니던 곳이나 죽은 이의 전답이 있는 곳을 지나가기도 한다. 상여가 마을을 빠져 나가는 도중에 노제를 모신다. 노제는 죽은 이가 평소 잘 다니던 길에서 모신다.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산신제를 모신다. 산신제는 묘자리 위쪽에 모시는데 술, 삼색실과, 포 등을 차려 놓고 모셨다.
하관 준비가 되면, 사전에 좋은 시간을 가려서 관을 넣는다. 좋은 시간은 대체로 죽운 이의 생일 연월시를 따져서 잡는다. 하관한 뒤에 흙을 완전히 덮어 다진다. 그리고 나서 평토제를 모시는데, 봉분을 쌓기 전에 모신다. 평토제를 모시는 동안 빈 상여는 태워 버린다. 그리고 상주는 혼백을 모셔 집으로 돌아와 초우제, 재주제, 삼우제를 모신다.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땅에 묻지 않고 마을 가까이에 자리를 정해 관을 놓고 그 위에 짚으로 이엉을 엮어 놓아두는 것을 초분(草墳)이라고 하는데, 원강정 마을에서는 초빈, 체빈이라고 부른다. 초분은 그 다음 해에 이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