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록』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572
한자 -金鑑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424년 6월연표보기 - 『금감록』 편찬
성격 문헌
권책 1책 5장
행자 6행 17자 석판본
규격 19.5㎝[가로]|30.0㎝[세로]

[정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 은거했던 최양 자손에게 세종이 내린 책.

[개설]

『금감록』태조전주 최씨 최양을 위해 지은 책으로 1424년(세종 6)에 최양 가문에 내렸다. 최양포은 정몽주의 조카로서 태조 이성계와는 어릴 적 친구였으며, 1380년 황산대첩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정몽주가 1392년 4월에 선죽교에서 죽자 최양은 남쪽 지방 진안에 내려와 중대산으로 깊이 숨어 3년간 속세와 등졌다.

태조가 숭록대부 영의정 좌의정 두 개의 벼슬을 주면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가족과 함께 완산의 봉강리(鳳崗里) 선영 아래에 8~9년 동안 살았고 태조가 온양에 온천욕을 하려 와서 한림 이유지에게 선물을 들려 최양에게 보내 불렀지만 최양은 병을 핑계 삼아 나가지 않았다. 태조는 다시 예조 참의 조영무를 보내 최양을 부르니 행궁에 들어가 태조와 만났지만 임금과 신하의 예의는 갖추지 않았고 태조와 거리를 두었다.

1424년에 최양이 죽었을 때, 세종은 특령을 내려 ‘만일 그 자손이 벼슬에 오르거든 어김없이 쓸 것이며, 그 자손이 혹 살인한 자가 있을지라도 악형을 주지 말고, 군역의 폐를 당할 때에 그를 살피지 못한 관리에게는 형을 주고 징계하리라’ 하였다. 이러한 뜻으로 승지를 보내어 제문을 지어주었다. 이 약속의 견고함이 금석과 같은 고로 책 이름을 『금감록』이라 하였다.

[저자]

『금감록』태조 이성계가 짓고, 세종이 책으로 발간했다.

[편찬/간행 경위]

『금감록』최양이 죽은 후 1424년(세종 6) 6월에 궁중 장서각에 있는 기록을 필사하여 책으로 만들어 최양의 아들에게 내어 주었던 것인데, 『금감록』이 불에 타 없어지자 최양의 7세손 최제(崔濟)가 궁성에 가서 여러 날 동안 울며 호소하자 정성을 가상히 여긴 관계자가 장서각(藏書閣)에서 원본을 베껴준 것이다. 그리고 『금감록』은 다시 1900년에 석판본으로 간행되었다.

[형태/서지]

1책 5장, 6행 17자, 석판본이다. 크기는 가로 19.5㎝, 세로 30㎝이다.

[구성/내용]

『금감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조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덕한 사람으로 왕위에 올랐다. 저번에 정몽주의 절사함은 실로 슬픈 일이므로 이미 조영규에게 죄를 주었으나 죽은 이는 죽은 것이므로 슬프게 생각할 뿐이다. 고려의 충신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돌이켜 보건대 두문동 72 충신들이, 어떤 이는 처자를 죽이고 또 자신이 분신 자살 하기도 하고, 숨어살며 벼슬도 마다하고 깊은 산속에 은신하기도 하였다.

내 생각컨대 혁명이 일어나 나라가 바뀌는 싸움이 벌어질 때에 충절을 지키는 것은 사람으로서 떳떳한 일이라고 본다. 주나라 백이숙제와 제나라 왕촉이며 한나라의 엄광이다. 이와 같은 일에 다를 바 없도다. 혹 돌아오면 우대하여 높은 벼슬을 주고 또 천추에 전할 이름을 주어 표창도 하였다.

여기 고려 조정의 보문각 대제학 문하찬성사 겸 이부상서판 호조 상서 시사 춘추관사 영서운관사 최양은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최양포은의 생질로 포은을 스승으로 모셨다. 천품이 청직하고 강열하며 간신배 임견미의 무리들이 최양을 우러러 보며 범과 같이 무섭다 하였다.

임신년 4월에 포은이 선죽교에서 순절하자 최양은 남으로 향하여 진안 중대산으로 깊이 들어가 3년간 속세와 등지셨다. 태조께서 숭록대부 영좌 이상의 벼슬을 주시며 불렀으나 이를 받지 않으시고 처자를 데리고 전주로 옮기매, 태조께서 목욕하러 온양으로 떠나시면서 한림 이유지를 시켜 패백을 갖고 가서 최양을 맞으라 했으나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가시지 아니하니, 다시 예조 참의 조영무로 하여금 군신의 예를 갖추지 않을 것임을 전하도록 했으나 최양은 글을 올리고 가시지 않았다. 또 근신 예조 판서 김약채에게 돈독히 일러 가로되, 만약 이번에도 오지 않으면 그 집을 찾아 갈 것이라는 전갈을 받고 할 수 없이 벼옷에 가죽 띠를 두르고 궁에 들어가셨다.

이때 태조께서는 평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우리 친구 백함이 왔는가, 본지 오래네, 백발이 성성하네. 조정에 있지 않을지언정 가끔 찾아주지 않겠는가?’ 하며, 옆 신하를 시켜 곡물과 의복을 주니 최양이 말하기를, ‘한 동네에서 살았고, 한 이불속에서 잠잤고, 한 과장에서 과거하였으며, 한 조정에 출입하여 옛정은 형제와 다를 바 없으나 오늘의 처지는 다르니, 왕은 비록 나를 버릴지언정 나는 왕을 저버리지 못하여 진배하였도다.’하며 ‘운수가 불행하여 이미 대왕에게 돌아갔거늘 어찌 자주 만날 수 있으리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가장을 맞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태조께서는 완산의 공전 800결을 주며 생활하라고 하였으나 최양이 공손히 사양하며 ‘고려조정에서 벼슬할 때 녹 받은 게 많았고 왕의 사랑 받음이 커서 집안이 넉넉하고 하인들도 많지 않으니 다시 왕의 은혜가 아니라도 의식이 자족하다’ 하였더니 좌우의 신하들이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께서 만류하기를, 오라고하여 보기를 원할 때부터 이럴 줄 알았는지라, 주나라 무왕은 왕이 되어 백이숙제가 말을 잡고 간하니 좌우신하들이 죽이려고 하나, 태공이 가로되 이는 의로운 사람이니 놓아 보내라 하여 그 후 어진 군신이란 칭을 받았는지라.

지금 양이 반드시 곧은 말을 하였거늘 어찌 가히 죽일 수 있으랴. 옛날에 광무가 천자 되어 엄광을 친구로 대접하였거늘 나는 제후 왕으로서 충현의 선비를 해하리오. 최양은 곧 완산으로 돌아갔다.

갑진년에 의 별세 소식을 듣고 세종께서 또한 슬퍼하며 어찌할 줄 모르다가 3일간 조회를 폐하고 고기를 먹지 않으시며, 성복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특령을 내리기를 ‘만일 그 자손이 벼슬에 오르거든 어김없이 쓸 것이며, 그 자손이 혹 살인한 자가 있을지라도 악형을 주지 말고, 군역의 폐를 당할 때에 그를 살피지 못한 관리에게는 형을 주고 징계하리라’ 하였다. 이러한 뜻으로 승지를 보내어 제문을 지어주며 가로되 한문 도덕은 정이천 같고, 절의 청직은 엄광과 같다. 최양은 선왕이신 태조대왕과 같이 아지발도와 싸울 때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거늘 어찌 최양을 잊을쏘냐.

이 책의 견고함이 금석과 같은 고로 책 이름을 ‘금감록’이라 하였다. 나는 자손에게 전하기를 이씨가 영원히 살 때까지 잊지 않을 뜻으로 장서각에 비치하고 한 권을 그 아들에게 내주었다.

갑진(甲辰) 6월 26일 도승지 김성지가 금감록을 갖고 찾아와 건네주었다.

영락 22년(1424, 세종 6) 월 일

이 금감록을 화중에 소실하여 만육 7세손 최제가 수일 동안 땅을 치며 통곡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겨 다시 장서각에서 내어 등서하여 주었다.”

[의의와 평가]

만육 최양의 행적 및 태조, 정몽주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문건이다. 석판본의 형태이지만 『금감록』의 완연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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