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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진안군 주천면 에 화양 도원 을 건립한 학자. 일찍이 궁내부(宮內府) 판임관(判任官)을 지냈으나, 1910년 일본 의 강탈로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진안 으로 내려와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에 화양 도원(華陽道院) 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22년 이후에는 전국의 7개소에 황단(皇壇)을 설치하여 삼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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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현(金奎鉉) [1879~1950]은 진안군 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부터 주천면 의 청년 김영필(金永弼) 등이 『대한민보』 와 『독립신문』 등 독립운동 ... 등지에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20년 1월 김영필 은 주천면 경찰 주재소 에 검속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하며 증인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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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진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긍구당 김중정(金重鼎) 의 10세손이다. 김영필(金永弼) [1896~1975]은 진안군 주천면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김태현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2세에는 사립 화동 학교(華東學校) [현 주천 초등학교 의 전신]에서 수학하였으며 졸업 후 이곳의 교사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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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은진(恩津) . 자는 윤직(允直) , 호는 경헌(敬軒) . 송필용(宋弼用) [1904~1951]은 진안군 주천면 신양리 에서 태어났다. 사립 화동 학교 [현 주천 초등학교 ]에 다니면서 이덕응 에게서 수학하였고, 재학중인 1919년 3·1 운동 이 일어나자 선두에 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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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주한(金周漢) [1882~1959]은 충청남도 금산군 남면 마제리 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하오 4시 경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소재 사립 화동 학교(華東學校) 교정에서 동교 학생들이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을 목격하고, 그곳에 달려가 크게 용기를 칭찬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다시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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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성구(成九) , 호는 지산(支山) . 아버지는 양경현(梁璟鉉) 이다. 양봉래(梁鳳來) [1874~1950]는 아버지 양경현 을 따라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로 들어와 7살 때부터 김태현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1년(고종 28)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후인들의 교육을 걱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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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시려 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3년간이나 생명을 연장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3년간 시묘 살이를 하였는데, 안수기 가 성묘하던 자리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양지말 삼거리 에 정려비각이 있다. 1963년 건립되었고, 비표(碑表)에는 ‘효자 안공 기적비(孝子安公紀蹟碑)'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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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용기와 지략도 매우 뛰어났다. 진안 에서는 1919년 3월 25일 진안읍 장날을 기해 수 백 명이 모여 만세 운동을 벌였고, 4월 3일에는 주천면 , 4월 6일에는 마령면 , 4월 12일에는 성수면 , 4월 13일에는 다시 마령면 등에서 만세 운동이 계속 이어졌다. 전성권 도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