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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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孝烈-傳說 |
영어의미역 | Legend about Loyalty, Filial Piety and Fedelit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충효열에 관한 이야기.
[개설]
조선시대 우리 민족은 유교적인 윤리 관념에서 충효열(忠孝烈)을 인간 생활의 가장 중심이 되는 덕목으로 삼았다. 그래서 충효열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 곳곳에서 도덕적인 교훈을 주고자 여러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내용]
여수 지역에도 충효열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여수 지역에는 충(忠)에 관한 이야기가 한 편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고, 효(孝)와 열(烈)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지역과 같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 온다.
1. 충(忠)에 관한 이야기
공은(孔隱)[1348~1403]은 고려 후기의 정승이다. 공은은 중국 공자 53대손으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원나라 노국공주가 고려의 공민왕과 결혼하여 고려에 올 때 수행했다가 귀화해서 평장사 벼슬을 지낸 공소의 후손이다. 공은의 형 공부는 조선 전기 보문각대제학 벼슬을 지냈으나, 공은만은 벼슬을 거부하고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영취산 밑 해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위화도회군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여수현감 오흔인의 절의로써 여수는 반역향이라는 서러움을 조선시대 내내 받았다. 여수 지역에서 충에 대한 설화는 공은과 관련한 삼일포와 낙포 이야기 하나다. 여수의 역사적 배경을 살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1) 삼일포와 낙포
고려 후기 평장사 공은은 국교인 불교의 타락상을 개탄하여 유교를 숭상해야 한다고 임금께 진언하였다가 노여움을 사서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낙포동 지역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는데, 기러기가 이곳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조선 전기 이성계가 공은의 사람됨을 알고 조정에 나와 벼슬을 맡아 달라고 했으나 공은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하고 여수 지역에서 살다가 죽게 되었다. 공은이 죽던 날, 낙향할 때 따라왔던 기러기도 공은의 죽음을 보고서 사흘 동안이나 공은의 처소 주위에서 슬피 울며 배회하다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2. 효(孝)에 관한 이야기
효자 이현두에 관한 이야기는 인육 공양에 관한 이야기이며, 효자 강릉유씨와 효자 박윤하에 관한 이야기는 치성 설화이다. 효행 설화는 위에서 대체로 효성이 지극한 효자에게 도움을 주어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지도록 이야기가 꾸며져 있다. 과거 효에 관한 내용은 아이들의 교과서와 같은 소학에 많이 실려 있으며, 인륜이나 도의를 발흥시키고자 충효록이나 행실도 등이 간행되면서 더 많은 효행 설화를 탄생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보다 인간의 윤리를 강조하고자 민담까지도 전설적 요소를 가미한 예는 어디서든 볼 수 있다.
1) 효자 이현두
미평동 소정마을 뒷길에 이현두의 효행을 기리는 이현두 효자문이 있다. 이현두는 전주이씨로 개국 공신 양도공 이천우의 15세손이다. 천성이 순효하여 부모를 섬기고 마을 어른을 공경하니 향리 사람들은 이현두를 군자라고 칭했다. 조선 중기 이현두의 부친이 병이 들어 정성을 모아 치병에 임했으나 백약도 효험이 없었다. 이현두는 집 뒤 대성산에 산신 제단을 묻고 백일 정성을 다하였으며 마지막 밤에 백의를 입은 백발노인이 비몽사몽간에 나타나,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면 사람 생고기를 먹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 육회로 들게 했더니 수삼일 후 쾌차해 졌다고 한다.
2) 효자 강릉유씨
율촌면 신풍리 산곡마을에는 일찍이 강릉유씨가 살았다. 강릉유씨의 10대손은 생활이 곤란하여 학문을 계속하지 못하고 어렵게 살던 중 부친이 심한 병환으로 눕자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약을 써 보았으나 허사였다. 부친이 사경에 이르자 마지막으로 마을 뒤 수암산 바위 밑에서 깨끗한 계곡물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다.
기도에 답하여 갑자기 어디선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산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서 산삼을 구해 집으로 돌아온 강릉유씨는 산삼으로 부친의 건강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조정에까지 퍼져 임금님은 친히 통정대부 벼슬과 효자상을 하사하였는데, 후손들은 지금도 효자비를 세워 제사를 모시며 숭앙하고 있다.
3) 「효자 박윤하」
거문도에서 출생한 박윤하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 후덕하여 거문도 주민들의 총애를 받고 자랐다. 병석에 누운 부친이 살아 있는 전복을 먹고 싶다고 하자 바닷가에 나가 보았으나 파도가 너무 거세어 감히 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어 바다가 잔잔해질 때까지 울며 바닷가를 헤매고 있었는데, 천우신조였는지 굵은 전복 3마리가 바닷가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천지신명께 울면서 절하고 아버지께 죽을 쑤어 올렸는데, 이튿날이 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십 마리의 까마귀들이 전복 한 마리씩을 물고 와서 마당에 떨어뜨려 주고 갔다. 이는 효성에 감탄한 신령님의 소위라 하여 반포보은이라는 말로 여수 지역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 소문을 들은 조정에서는 효자 정문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호조참판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3. 열(烈)에 관한 이야기
열녀 설화도 역시 효행 설화와 함께 교육적 목적이 강하다. 『삼국사기』 열전의 「도미(都彌)의 아내」나 『삼국유사』의 「도화녀(桃花女)」에서 보듯, 아내들의 남편에 대한 절의는 시대를 초월하여 강조되어 왔다. 가부장적 사회의 한 단면이라고는 하지만, 일편단심의 윤리관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수 지역의 열녀 설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 오동도 동백나무
오동도에는 오동나무 열매를 따 먹으러 많은 봉황새가 찾아오곤 했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오동도 지역에 귀양 온 한 쌍의 부부가 땅을 개간하고 고기잡이로 살아갔다.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간 틈에 도둑이 들어 아내를 겁탈하려 하자 낭떠러지에서 투신자살했다.
날이 저물 무렵 섬에 돌아오던 어부는 낭떠러지 밑에서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오동도의 정상에 묻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자 그 묘에 여인의 절개를 나타내듯 시누대와 동백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오동도에는 오동나무 대신 동백나무가 많이 번져 눈보라 속에서도 그 꽃을 피우기 때문에 여심화(女心花)라고도 부른다.
2) 상술박엉
초도 의성리마을 건너편에서 동쪽으로 쭉 뻗어난 산자락 끝에 상술박엉이라는 높은 절벽이 바다와 접해 있다. 옛날, 장래를 약속한 총각이 다른 처녀와 눈이 맞아 그녀를 홀대하기 시작했다. 이에 그 처녀는 이곳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 후, 총각이 가는 곳마다 그녀는 뱀으로 변하여 쫓아다녔다고 한다. 청년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면서 손끝을 깨물어 절벽에 유언을 써 놓고 바다에 뛰어내려 자결하고 말았으며, 이에 뱀도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물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