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862
한자 -馬耳山記-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62년 - 이도복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이도복 「마이산기」 저술
편찬|간행 시기/일시 1925년 - 「마이산기」 『후산집』에 수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38년 - 이도복 사망
배경 지역 마이산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지도보기
성격 기문(記文)
작가 이도복(李道復)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마이산에 대해 소개한 이도복(李道復)의 기문(記文).

[개설]

「마이산기」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1862~1938]이 오채열(吳采烈)의 부탁을 받고 저술한 기문(記文)이다. 마이산 명칭의 유래와 영험함, 그리고 마이산을 찾은 유명 인사들과 덕인들에 대하여 문헌의 내용을 들어 소개하였다. 또한 마이 구곡에 대한 인문적인 해설을 포함하여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후산 이도복은 3·1 독립 만세 운동의 실패와 망국의 한을 달랠 길이 없어 호남과 영남을 전전하다가 1925년 봄에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이산정사(駬山精舍)에서 마이동천(馬耳洞天)의 구곡 형승(九曲形勝)을 음미하며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와 함께 「마이산기」를 지었다고 한다. 이도복의 문집으로는 『후산집(厚山集)』 11권이 있으며, 「마이산기」『후산집』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

「마이산기」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단락에서는 마이산 명칭의 유래와 영험함, 그리고 역대 왕이었던 태조태종, 그리고 김종직조위 등이 마이산을 찾아서 제를 지내고 시를 지었던 사실을 기록하였다. 둘째 단락에서는 마이 구곡에 대하여 제1곡부터 제9곡까지 순서대로 서술하면서 명인과 현인들의 유적을 소개하고 있다. 셋째 단락에서는 기문을 짓게 된 연유를 서술하였다.

[내용]

1. 원문

「마이산기(馬耳山記)」

마이산수출해동지호남경상(馬耳山秀出海東之湖南境上) 진천하지기절야(眞天下之奇絶也) 기산지위체야(其山之爲體也) 용전석간소한(聳全石干霄漢) 쌍립첨봉(雙立尖峯) 형여마이(形如馬耳) 고득명언(故得名焉) 진안지운(鎭安誌云) 동봉부(東峯父) 서봉모(西峯母) 봉저유공(峯底有孔) 수생여유(水生如乳) 음첩감렬(飮輒甘冽) 부모봉생백자천손(父母峯生百子千孫) 동동라렬(童童羅列) 여속흑금(如束黑金) 고일명속금산(故一名束金山) 세한칙지주도우(歲旱則地主禱雨) 유령험언(有靈驗焉) 우안야사급진안구지운(又按野史及鎭安舊誌云) 석아태조미시(昔我太祖微時) 흥사남정(興師南征) 역등차산(歷登此山) 의마부시(倚馬賦詩) 급룡비구오(及龍飛九五) 태종남순(太宗南巡) 시망제고언(柴望祭告焉) 기후(其後) 금점필종직조매계위유차(金佔畢宗直曺梅溪偉遊此) 개유창수시(皆有唱酬詩) 필옹시유왈(畢翁詩有曰) 우몽중동고(偶蒙重瞳顧) 가명전만사(佳名傳萬祀) 개찬선왕주필지유촉야(蓋贊先王駐蹕之遺躅也) 자시(自是) 명공석덕(名公碩德) 소인운사(騷人韻士) 족적태불절언(足跡殆不絶焉) 범입차산자(凡入此山者) 이좌포대두산위제일곡(以左浦大頭山爲第一曲) 소류이상(溯流而上) 가이식득기기절형상야(可以識得其奇絶形狀也) 대두지하(大頭之下) 석두유풍혈(石竇有風穴) 동일칙화풍(冬日則和風) 하일칙냉풍(夏日則冷風) 장취불절(長吹不絶) 혈하유냉천(穴下有冷泉) 한온지후(寒溫之候) 역여지(亦如之) 포지상봉황대(浦之上鳳凰臺) 구유천인정(舊有千仞亭) 연재송선생(淵齋宋先生) 상남유이산(嘗南遊駬山) 등차翺상(登此翺翔) 작문이기지(作文以記之) 포지동도통리(浦之東道通里) 유최씨삼우당(有崔氏三友堂) 고종병오(高宗丙午) 면암최선생(勉菴崔先生) 순월류련이토론(旬月留連而討論) 양추지대의언(陽秋之大義焉) 제이곡왈구소(第二曲曰龜沼) 소지상양암굴(沼之上陽巖窟) 유송씨수선루(有宋氏睡仙樓) 연옹역기기사(淵翁亦記其事) 제삼곡왈광대봉(第三曲曰廣大峯) 석봉추줄(石峯崷崒) 취대분장(翠黛粉糚) 황약천상옥녀하강우인간야(怳若天上玉女下降于人間也) 봉지하유감로천(峯之下有甘露泉) 천지하유보흥암(泉之下有寶興庵) 암전천년고탑(庵前千年古塔) 열호겁이불륵언(閱浩怯而不泐焉) 탑지하(塔之下) 한류사출(寒流瀉出) 양봉지간(兩峯之間) 비폭직하석감중(飛瀑直下石龕中) 홍심무저(泓深無底) 명왈룡연(名曰龍淵) 일대천신(一帶泉紳) 혹관주언(或貫珠焉) 혹분설언(或噴雪焉) 불가명상(不可名狀) 행심수변층암(行尋水邊層巖) 천연작감(天然作坎) 수용기중(水湧其中) 영과이일자(盈科而溢者) 내세두분야(乃洗頭盆也) 인출동문(因出洞門) 영계서원유지재언(靈溪書院遺址在焉) 사림증사만육당최충익공(士林曾祀晩六堂崔忠翼公) 이충경공(李忠景公) 쌍첨리공(雙尖李公) 규암전공수현자야(葵菴全公數賢者也) 초서창애하(稍西蒼厓下) 신백담(申伯湛) 만력간여향인제명언(萬曆間與鄕人題名焉) 시지위삼계석문(是之爲三溪石門) 개월계(蓋月溪) 영계(靈溪) 쌍계지수(雙溪之水) 지시이합성일계자야(至是而合成一溪者也) 쌍계석문(雙溪石門) 재기동삼리허(在其東三里許) 내최고운유묵모각자야(乃崔孤雲遺墨摹刻者也) 유정익연림우천상자(有亭翼然臨于川上者) 오상사도한여향중동지인구성자야(吳上舍道漢與鄕中同志人構成者也) 정하수무허(亭下數武許) 석벽서각면옹급기송사우만표제지어(石壁書刻勉翁及奇松沙宇萬標題之語) 인록기성명(因錄其姓名) 이열록기방자(而列錄其傍者) 수십인야(數十人也) 기하일리허(其下一里許) 구유최씨룡계사운(舊有崔氏龍溪祠云) 자령계심원(自靈溪尋源) 이입룡암(而入龍巖) 즉제사곡(卽第四曲) 이봉익수석익기(而峯益秀石益奇) 개개성금강신야(箇箇成金剛身也) 암면구각연옹성명(巖面舊刻淵翁姓名) 이태식난간(而苔蝕難看) 고금이각우마이동천(故今移刻于馬耳洞天) 동천시제오곡야(洞天是第五曲也) 개룡암거쌍계(蓋龍巖距雙溪) 불과오리허(不過五里許) 입동천불만수궁허(入洞天不滿數弓許) 연오리허(然五里許) 칙협광야준대로(則挾曠野遵大路) 조망개활(眺望開豁) 수궁허(數弓許) 칙내중첩창병야(則乃重疊蒼屛也) 루도석잔(屢渡石棧) 홀당곡구(忽當谷口) 만인취벽(萬仞翠壁) 동서대립(東西對立) 자작석문(自作石門) 징담홍정(澄潭泓渟) 가이세천곡진토야(可以洗千斛塵土也) 세갑자춘(歲甲子春) 동중제생상취이모왈(洞中諸生相聚而謀曰) 진안시연면량옹장구지향(鎭安是淵勉兩翁杖屨之鄕) 이마이위호남지명승야(而馬耳爲湖南之名勝也) 차간불가무량옹지정사(此間不可無兩翁之精舍) 어시(於是) 순모우역중사우(詢謀于域中士友) 위연면량옹수계(爲淵勉兩翁修契) 우부취만여금(又裒聚萬餘金) 조성시역(助成是役) 이송군진환(而宋君振煥) 이동천일구부언(以洞天一區扶焉) 수각국중명석급동계원성명어연옹지측(遂刻國中名碩及同契員姓名於淵翁之側) 대서마이동천주필대칠자어기석면(大書馬耳洞天駐蹕臺七字於其石面) 대저기석상원하평(大抵其石上圓下平) 함하삭입여옥모연(谽谺削入如屋帽然) 족이피풍우언(足以避風雨焉) 익년을축춘(翌年乙丑春) 경시사역(經始舍役) 택지어기포중평광지지(擇地於其抱中平曠之地) 초공결구(招工結構) 옥지제범사간(屋之制凡四間) 서왈인지재(西曰仁智齋) 동왈려택헌(東曰麗澤軒) 건축일옥어사후(建築一屋於舍後) 명왈회덕전(名曰懷德殿) 용형민제소지의(用荊民祭昭之義) 장인사태조태종이미가언(將禋祀太祖太宗而未暇焉) 사지동협실치일감(舍之東夾室置一龕) 모봉연재면암이선생진영(摹奉淵齋勉菴二先生眞影) 이편기미왈(而扁其楣曰) 고경각(高景閣) 총명기사왈이산정사(摠名其舍曰駬山精舍) 외문왈(外門曰) 치종문(致宗門) 문방량협실위고사(門旁兩夾室爲庫舍) 사범칠간(舍凡七間) 개이와복지(皆以瓦覆之) 료지이장(繚之以墻) 지하사월음락언(至夏四月飮落焉) 실사문지성거야(實斯文之盛擧也) 제육곡왈라옹암(第六曲曰懶翁菴) 암재천상굴(菴在天上窟) 고지라옹선사수도우차운(古之懶翁禪師修道于此云) 제칠곡왈금당사(第七曲曰金塘寺) 제팔곡왈봉두굴(第八曲曰鳳頭窟) 제구곡내마이절정(第九曲乃馬耳絶頂) 정저고기(頂底孤寄) 신창불우(新刱佛宇) 역일기관야(亦一奇觀也) 인모효석담부자휘음(因慕效石潭夫子徽音) 속성이산구곡가일결(續成駬山九曲歌一闋) 이유당세지지음자(以遺當世之知音者) 청여기자(請余記者) 오군채렬기인야(吳君采烈其人也)

2. 번역문

마이산은 해동의 호남 땅에 있는데 참으로 천하의 절경이다. 이 산의 형체는 바위 전체가 구름 위에 솟았는데 쌍으로 솟은 뾰족한 봉우리가 마치 말의 귀와 같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이다. 진안지(鎭安誌)에 이르기를 “동쪽 봉우리는 아비이고 서쪽 봉우리는 어미이며 봉우리 밑에 구멍이 있어 물이 솟아나는데 마치 젖과 같아 마시면 달고 차다. 아비 어미 봉우리에서 백자(百子) 천손(天孫)이 생겨나 옹기종기 나열된 것이 마치 검은 쇠붙이를 묶어 놓은듯하다 하여 일명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한다. 가뭄이 든 해에는 지주(地主)[수령]가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야사와 진안 구지(鎭安舊誌)를 보면 “우리 태조가 미천하였을 때에 군사를 일으켜 남정할 적에 지나는 길에 이 산에 올라 말에 기대어 시를 지었다. 등극하여서는 태종(太宗)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시망제(柴望祭)를 지내어 고하였다. 그 뒤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매계(梅溪) 조위(曺偉)가 이곳에 놀면서 수창(酬唱)한 시가 있는데 점필재 옹의 시에 이르기를 ‘우연히 중동(重瞳)[항우]의 돌아봄을 입어 훌륭한 이름 만세에 전하게 되었네’라고 하였다. 이는 대체로 선왕께서 주필한 유적을 찬양하여 말한 것이다. 이로부터 유명 인사들과 큰 덕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시인 묵객들의 족적이 거의 그치지 않았다.” 하였다.

무릇 이 산에 들어가고자 한 사람은 좌포(佐浦)의 대두산(大頭山)을 제일곡(第一曲)으로 삼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기절(奇節)한 형상을 알 수 있다. 대두산 아래에는 석굴이 있고 그 안에는 풍혈이 있으며 풍혈 아래에는 냉천(冷泉)이 있는데 따뜻하고 차가움은 풍혈과 똑같다. 좌포 위의 봉황대에는 지난 날 천인정(千仞亭)이 있어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일찍이 남으로 이산(駬山)에 노닐 적에 여기에 올라 회포를 풀고 글을 지어 기록하기도 하였다. 좌포의 동쪽 도통리에는 최씨의 삼우당(三友堂)이 있는데 고종 병오년(丙午年)[1906]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달포를 머무르면서 춘추의 대의를 토론하였다. 제2곡(第二曲)은 구소(龜沼)인데 소 위의 양암굴(陽巖窟)에는 송씨의 수선루(睡仙樓)가 있고 연재가 그 기문을 쓰기도 하였다. 제3곡(第三曲)은 광대봉(廣大峯)인데 석봉이 길고 높으며 검푸르게 분장하여 황연(怳然)히 천상의 옥녀가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는 듯하다. 봉우리 아래에는 감로천(甘露泉)이 있고 감로천 아래에는 보흥암(寶興菴)이 있으며 암자 앞의 천년 고탑은 백 겁(劫)을 지나면서 부서지지도 않았다. 탑 아래에는 찬물이 솟아나고 두 봉우리 사이에는 나는 듯한 폭포가 돌 웅덩이 속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데 깊이를 알 수 없고 이름은 용연(龍淵)이다. 그 일대의 시내는 혹은 구슬을 꿰놓은 듯하고 혹은 눈보라를 뿜어내는 듯 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걸어서 물가의 층암을 찾으면 천연적으로 웅덩이가 만들어졌고 물이 그 속에서 솟구쳐 웅덩이를 채운 뒤에 넘쳐흐르니 바로 세두분(洗頭盆)이다. 이내 동문을 나서면 영계 서원(靈溪書院)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사림들이 일찍이 만육당(晩六堂) 최충익공(崔忠翼公)이충경공(李忠景公) 상형(尙馨), 쌍첨(雙尖) 이인현공(李仁賢公), 규암(葵菴) 전계종공(全繼宗公) 등 여러 현자들을 모신 곳이다. 조금 서쪽으로 푸른 절벽 아래에는 신백담(申伯湛)이 만력(萬曆) 년간에 여러 명사들과 함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이를 ‘삼계 석문(三溪石門)’이라 하는데 월계(月溪)와 쌍계(雙溪)의 물이 이곳에서 합쳐져서 하나의 시내를 이루게 된다. 쌍계 석문은 그 동쪽 3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유묵(遺墨)을 탁본하여 새긴 것이다. 정자 하나가 나를 듯이 시냇가에 바짝 다가서 있는 것은 상사(上舍) 오도한(吳道漢)이 이 고장 동지들과 지은 것이다. 정자 아래 몇 발자국 거리에 있는 석벽에는 면옹(勉翁)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표제한 말을 아래 1리쯤 되는 곳에 각서하고 그 성명(姓名)도 기록하였는데 그 옆에 이름을 줄지어 기록한 사람이 수십인이다. 그 아래 1리쯤 되는 곳에는 전에 최씨의 용계사(龍溪祠) 터가 있었다. 영원(靈源)에서 용암(龍巖)으로 들어가면 바로 제4곡(第四曲)을 이루고 있다. 바위에는 지난날 연옹(淵翁)의 성명을 조각해놨는데 이끼가 끼고 부스러져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지금은 마이동천(馬耳洞天)으로 옮겨서 새겼는데 여기가 제5곡(第五曲)이다. 용암에서 쌍계까지는 5리쯤에 지나지 않고 동천(洞天)에 들어가려면 몇 바탕의 거리에 지나지 않으나 5리쯤은 넓은 들을 끼고 있고 큰 길을 따라 가자면 안계가 탁 트이는데 활 몇 바탕쯤은 아주 첩첩이 쌓인 절벽이다. 몇 차례 징검다리를 건너면 문득 골짜기의 어귀가 나서는데 만 길의 푸른 벼랑이 동서를 마주보고 서서 저절로 석문을 이루었고 맑은 못은 시퍼렇게 맑아 천곡(千斛)의 진토라도 씻어낼 만하다. 갑자년(甲子年)[1924] 여름에 고을의 여러 장보(章甫)들이 모여 상의하기를 “진안은 연재면암 두 선생의 장구(杖屨)가 머물렀던 곳으로 마이산은 호남의 명승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두 선생의 정사가 없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 고장의 선비들과 상의하여 연옹을 위한 계를 만들었는데 친친(親親)이라 이름 하였고, 면옹을 위한 계를 만들어 현현(賢賢)이라 하였으니 친친(親親)과 현현(賢賢)은 그 뜻이 하나였다. 또 두 계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고 또 만 여 금(萬餘金)을 모았는데 송진환(宋振煥) 군은 동천(洞天)의 한 구역을 희사하였다. 드디어 나라 안의 유명 인사와 큰 덕을 가진 인물, 그리고 계원 백여 명을 연옹 곁에 새겨 넣고 큰 글씨로 ‘마이동천주필대(馬耳洞天駐蹕臺)’ 일곱자를 그 석면에 새겨 넣었다. 대체로 그 돌은 위는 둥글고 아래는 평평한데 속이 비었고 깎아 세운 듯 하여 마치 지붕의 덮개 같아 족히 비바람도 피할만하다. 이듬해인 을축년(乙丑年)[1925] 봄에 정사의 일을 경영하여 터를 그 포중의 평탄하고 넓은 곳에 정하고 목수를 초청하여 집을 지었는데 그 제도는 모두 4칸으로 서쪽은 인지재(仁知齋)이고 동쪽은 이택헌(麗澤軒)이다. 또 집 한 채를 정사의 뒤에 짓고 연재면암 두 선생의 진영(眞影)을 본떠 그려다가 봉안하고 사당에 ‘고경각(高景閣)’이라 편액하였으며 그 집을 모두 통틀어서 이산정사(駬山精舍)라 하였고 문은 ‘치종문(致宗門)’이라 불렀다. 또 문 옆에 두 협실(夾室)을 만들어 고사(庫舍)로 삼았는데 고사는 모두 7칸이고 기와로 덮고 담장을 둘렀으며 여름 4월에 이르러 낙성하니 실로 사문(斯文)의 성대한 사업이다. 정사 뒤에 또 집 한 채를 지어 ‘최덕전(會德殿)’이라 이름하고 형주(荊州) 백성이 소왕(昭王)을 제사지낸 뜻을 따서 앞으로 태조고 황제(太祖高皇帝)를 제사지내려 하나 아직 겨를을 타지 못하였다. 제6곡은 나옹암(懶翁庵)으로 천상굴(天上窟)에 있는데 옛날 나옹 선사(懶翁禪師)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한다. 제7곡(第七曲)은 금당사(金塘寺)이고 제8곡(第八曲)은 봉두굴(鳳頭窟)이며, 제9곡(第九曲)은 마이산의 절정으로 절정 밑의 외딴 곳에 새로 불사(佛舍)를 지었는데 이 역시 하나의 기특한 경치이다.

이로 인하여 석담 부자(石潭夫子)의 휘음(徽音)을 모방하여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 한 꼭지를 지어 당세의 지음자(知音者)에게 부치나니 나더러 기문을 써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오채열(吳采烈)이다.

[특징]

문장이 짜임새 있게 서술되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빠져들게 한다. 특히 마이 구곡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제1곡에서 대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풍혈 냉천에 이르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노닐었던 천인정(千仞亭)을 언급함으로써 제9곡까지 가는 동안 과연 어떤 유적들이 있을까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의의와 평가]

「마이산기」마이산 명칭의 유래와 마이산을 찾았던 역대 인물, 그리고 유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마이산의 역사와 문화 가치를 알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이 기문을 가지고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마이산 관광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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