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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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耳山-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순철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45년 - 조귀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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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64년 - 조귀상 「마이산」 저술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12년 - 조귀상 사망 |
성격 | 칠언율시 |
작가 | 조귀상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마이산에 있는 수행굴과 금당사(金塘寺)를 보고 조귀상이 읊은 시.
[개설]
유현재(猶賢齋) 조귀상(趙龜祥)[1645~1712]은 선산 부사(善山府使)와 무주 부사(茂朱府使)를 지냈다. 문집으로는 『유현재집(猶賢齋集)』 2권이 있다. 조귀상이 선산 부사 시절에 선산의 양가 규수인 향냥(香娘)이 남편에게 핍박받고 숙부에게 개가를 강요당하자 연못에 빠져 죽은 일화를 『향냥전(香娘傳)』으로 지어 조정으로부터 정문(旌門)이 세워지도록 한 일은 매우 유명하다.
마이산에 있는 수행굴은 고려 말, 조선 초의 고승 나옹 선사(懶翁禪師)가 머무르며 수도한 굴이라 하여 나옹굴 또는 나옹암이라 부르는 자연 암굴이다. 지금의 마령면 동촌리 금당사 경내 북쪽 2㎞ 바위산에 위치하고 있다. 나옹굴 조금 위의 산언덕에는 고금당(古金塘)이 있다. 지금의 금당사는 고금당의 아래쪽 넓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진안 군사』의 기록에 의하면, 「마이산」 시는 「수행굴 기문」과 함께 1664년에 지어졌다 한다. 그러나 조귀상이 어떤 경위로 마이산을 방문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그의 시구 중에 “우연가회속운림(偶然佳會屬雲林)”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이산 근처에서 어떤 모임을 가지게 되어 마이산에 올라 수행굴을 찾아보고 기문을 지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내용]
「마이산」은 칠언율시 2수로 구성되었는데 수행굴과 금당사, 그리고 주변 경관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승경을 묘사함과 동시에 신선이 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읊고 있다.
1. 제1수
우연가회속운림(偶然佳會屬雲林)[우연히 좋은 모임을 운림에 내맡기니]
정계연하가척금(靜界煙霞可滌襟)[고요한 안개 속에 흉금이 깨끗하네]
왕사불수화누설(往事不須和淚說)[지난 일 눈물겨운 얘기는 하지를 말고]
신시단합파배음(新詩端合把杯吟)[새로운 시 술잔을 들며 읊조리구려]
풍취동설매인적(風吹凍雪埋人跡)[바람 불어 언 눈 속으로 발자취 사라지고]
우쇄송한상객심(雨洒松寒爽客心)[비 뿌려 소나무 차가우니 나그네 마음 시원하네]
향만재승참불조(向晩齋僧參佛祖)[해질녘 재 지내는 스님이 예불을 드리니]
석종요출동천심(夕鐘遙出洞天深)[저녁 종소리 울려 퍼져 산골이 저절로 깊네]
2. 제2수
죽공요불별구연(竹筇遙拂別區烟)[대지팡이로 저 멀리 별천지 안개를 쓸어내니]
척진흉중진세연(滌盡胸中塵世緣)[가슴 속에 쌓인 세속의 인연 다 씻어내네]
운수원준반후지(雲峀遠蹲蟠厚地)[구름 피는 산 바위는 멀리 웅크려 땅에 서려있고]
옥봉쌍립삽고천(玉峰雙立揷高天)[옥 같은 두 봉우리 우뚝 높이 하늘 위로 솟았네]
빙애현국만천곡(氷崖懸跼萬千曲)[얼어붙은 벼랑에 걸려 있는 길은 천만번 굽이돌고]
석굴서암삼사연(石窟栖庵三四椽)[석굴에 깃든 암자는 서까래가 서너 개 뿐이네]
자시금미성우객(自是今未成羽客)[여기서 이제 신선 나그네가 되지 못한다면]
해산하처즉구선(海山何處卽求仙)[다른 강산 어느 곳에서 신선되길 바라리오]
[특징]
조귀상의 「마이산」 제1수는 비유적 표현이나 함축적 시어는 없지만 고요하고 안개 자욱한 신비로운 자연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산사의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이 서방정토임을 표현하였다. 제2수 역시 특별한 함축적 표현 없이 수행굴의 신비로운 모습과 멀리 내다보이는 승경을 묘사하고 그곳에서 신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이미 자신도 모르게 신선의 경지에 오른 감개를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수행굴에서 느낀 감회를 제1수에서는 불교적 입장에서 표현하고 제2수에서는 도교적 입장에서 연작시로 표현하여 수행굴의 옛 모습과 옛 문인의 감회를 알 수 있는 시이다. 이 시를 통하여 유교적 조선 사회에서도 문인들의 불교와 도교적 취향이 여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