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육 최양 선생 유허비 묘갈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856
한자 -晩六崔瀁先生遺墟碑墓碣文-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360-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98년 - 기정진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기정진 「만육 최양 선생 유허비 묘갈문」 저술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79년 - 기정진 사망
배경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360-2 지도보기
성격 묘갈문
작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에 있는 만육(晩六) 최양(崔瀁)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의 비문.

[개설]

「만육 최양 선생 유허비 묘갈문」만육 최양 선생 유허비에 적혀 있는 비문이다. 비문의 주인공 최양[1351~1424]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비문은 전라남도 순창 출신으로 성리학자이며 서예가로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지었다. 묘갈문이 쓰여진 때는 비가 건립된 1871년이다.

묘갈문이 적혀 있는 만육 최양 선생 유허비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81호이며,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시냇가 절벽 위에 있는 구남각 안에 있다. 거북 좌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구성]

「만육 최양 선생 유허비 묘갈문」은 서문(序文)과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만육 최양 선생의 충절을 백이(伯夷)·숙제(叔弟)나 엄광(嚴廣)에 비유하면서 비를 세우게 된 연유를 밝히고, 명(銘)에는 은둔해서부터 비석을 세우기까지의 전말에 대하여 썼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48㎝, 폭 60㎝, 두께 24㎝로 화강암 재질이며, 거북 좌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귀부와 이수의 조각은 통일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의 석비와는 달리 화려하지 않고 귀부에는 용 두 마리를 단순하게 결합하여 표현하였다. 비각에는 ‘구남각(龜南閣)’이라 적혀 있으며, 비석 앞면에는 “만육 최선생 둔적 유허비(晩六崔先生遯迹遺墟碑)”라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노사 기정진이 지은 묘갈명의 내용이 적혀 있다. 글씨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글씨체는 우아하면서 힘차다.

[내용]

1. 번역문

만육 최공은 우리 성조(聖朝)[태조]와는 동한(東漢)의 은자였던 엄자릉(嚴子陵)과 광무제(光武帝)의 사귐과 같은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행궁(行宮)에 한 번 나아가는 것을 세상에서는 객성(客星)이 제자리를 범하는 일에 비겼다. 그러나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으려는 의리는 또 다만 엄자릉이 그 일을 고상하게 여긴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상론(尙論)하는 자들이 간혹 만육의 의리를 백이(伯夷)·숙제(叔弟)나 엄광의 충절과 같다고 하였다.

이곳은 공이 자취를 감추었던 곳으로 권근(權近)이 묘지문(墓誌文)에서 말한 중대산(中臺山)이다. 뒤로 봉강묘(鳳岡墓)[만육의 차자 묘] 아래에 옮겨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 중대산이 평지로 바뀌지 않을 것이니 선생의 유풍은 산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비석을 세우겠는가. 비석을 세우는 일은 자손의 사사로움이다. 나에게 와서 묘지명을 청한 자는 최씨의 두 후손인 봉익(鳳翊)과 종대(鍾大)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붙인다.

고려 말 왕 임신년(壬申年)[1392]에 은둔하여 들어오니, 사직이 무너지기 몇 십일 전이라. 사직이 와해된 뒤에 봉강으로 가시어 계셨도다. 보록(寶籙) 33년 갑진년(甲辰年)[1424]에 돌아가시고 성상(聖上)이 신미년(辛未年)[1871년] 봄에 비석을 세웠다. 오호라, 돌아가셔서 비석을 세우기까지 480년이 걸렸다.

행주인(幸州人) 기정진(奇正鎭)이 쓰다.

2. 원문

만육최공(晩六崔公) 어아성조(於我聖朝) 유엄릉지계(有嚴陵之契) 행궁일진(行宮一進) 세의지범좌객성(世擬之犯座客星) 연공망복지의(然公罔僕之義) 우비단엄지고상기사(又非但嚴之高尙其事) 고상론자우혹이위백이엄광합위일인(故尙論者又或以爲伯夷嚴光合爲一人) 차기둔적지지(此其遯跡之地) 권근지문소칭중대산자시야(權近誌文所稱中臺山者是也) 후이봉강묘하이종(後移鳳岡墓下以終) 중대지산불평(中臺之山不平) 선생지풍여지구장(先生之風與之俱長) 하이비위(何以碑爲) 비언자운잉사야(碑焉者雲仍私也) 래구명자(來求銘者) 최씨이수봉익종대명왈(崔氏二秀鳳翊鍾大銘曰) 둔입려말왕임신(遯入麗末王壬申) 전호사옥(前乎社屋) 증미기순(曾未幾旬) 와후봉강(瓦後鳳岡) 자자사의(自玆徙倚) 고종우보록삼십삼년갑진(考終于寶籙三十三年甲辰) 비우성상신미지춘(碑于聖上辛未之春) 오호수미미오백자이십년(嗚呼首尾未五百者二十年) 행주인기정진찬(幸州人奇正鎭撰)

[특징]

짧은 묘지명의 내용에 만육 선생의 생애가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으며 문장 표현이 간결하다. 다만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묘지명이 가공송덕의 내용을 문학적 표현을 들어 서술하는 것과 다르게 만육 선생의 묘지명은 은둔해서부터 비석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간략하게 서술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6대 성리학자 중의 한 사람인 노사 기정진은 비문을 많이 남기지 않았는데 이 비문은 그 중에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문에서 역사 전고와 핵심적인 행적 하나를 인용하여 최양의 의리 정신을 간단명료하게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묘갈문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비문을 통하여 만육의 절의를 알 수 있으며, 노사 기정진의 사상과 학문적 지향성이 의리 정신을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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