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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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克禮神道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산주길 111-3[도통리 18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미 |
[정의]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영사재(永思齋) 앞에 있는 전극례의 신도비
[개설]
전극례(全克禮)는 호가 낭헌(浪軒), 본관이 천안(天安)이다. 형조 판서 증좌찬성 문평공(贈左贊成 文平公) 도은(都隱) 전문식(全文軾)의 증손이며, 대사헌 천근(天近)의 손자이고, 판중추부사 사미(思美)의 아들이다. 세조가 즉위하자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신도비는 1946년에 건립되었다.
[건립 경위]
낭헌 전극례 신도비는 천안 전씨 종친회에서 세조가 즉위하자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 은거했던 낭헌 전극례를 기념하기 위해서 1946년에 건립하였다.
[위치]
성수면사무소에서 외궁 삼거리 방향으로 이동하다 마령면과 전라북도 무주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관진로를 따라 1.3㎞ 이동한다. 다시 성수면 도통리 중평 마을 방면으로 600m 이동하다가 좌회전하여 600m 더 가서 산주길을 따라 300m 이동하면 거사곡 영사재(永思齋)에 이르게 된다. 낭헌 전극례 신도비는 영사재 앞에 있다.
[형태]
낭헌 전극례 신도비는 기단인 비대석, 비신, 가첨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155㎝, 폭 55㎝, 두께 27㎝이다.
[금석문(내용)]
신도비 표면에는 “호판 낭헌 선생 전공 극례 신도비(戶判浪軒先生全公克禮神道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유양(維楊) 조중목(趙重穆)[1869~?]이 지은 신도비명이 새겨져 있다. 「전극례 신도비명 병서」에는 전극례의 가계, 관직 생활, 은거 생활과 순절, 배향, 묘소 등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마지막에 명(銘)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전극례의 단종에 대한 절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전극례 신도비명 병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관직 생활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도량이 넓고 문장이 장하여 당시에 이름난 재상 황희(黃喜)[1363~1452]나 허조(許稠)[1369~1439] 등과 서로 도의로 사귀었다. 세종 조에 정시에 올라 승문원 정자, 사헌부 정언 등의 벼슬에서부터 호조·공조·형조 참판에서 대호군의 요직을 거쳐 호조 판서 겸 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2. 은거 생활과 순절
1455년 어린 임금 단종이 수양 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전극례는 벼슬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선대부터 유서가 깊은 진안 마령의 강정리로 내려와 증조할아버지인 문평공 도은 선생의 유훈을 받들며 은거하게 되었다. 스스로 낭헌(浪軒)이라 호를 짓고 산 높고 물 맑은 월량의 자연에 묻혀 하늘을 뚫고 우뚝 솟은 마이산의 석봉에 자신의 마음 견주었다. 생육신의 중심 인물인 추강 남효온, 어계 조여 등 절의파 사림들과 교유하였다. 단종이 시해를 당하자 그의 아들 사간(司諫) 송당(松堂) 전자온(全自溫)과 사직(司直) 죽헌(竹軒) 전자양(全自讓)과 함께 청령포(淸寧浦)[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태화산(太華山) 아래에 있는 지명으로 단종의 유배지]에서 순절하였다.
3. 배향 및 묘소
사림들의 발의로 전극례와 그의 아들 전자온, 전자양이 나란히 이산사(駬山祠)와 영산사(靈山祠)에 배향되었다
4. 묘소
현재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산주 마을 뒤 골짜기 거사곡 북쪽 구릉에 천안 전씨의 묘단인 쌍충단(雙忠壇)[1923년 설단]이 있는데, 전극례의 두 아들과 그들의 부인을 각각 합장한 묘가 있고 그 위쪽에는 전극례와 그의 처 정부인 전주 이씨를 합장한 묘소가 있다.
[현황]
전극례 신도비는 천안 전씨 재각인 영사재 앞에 세워져 있다. 재각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비석은 천안 전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충의를 본받아 조선 세조의 패륜 행위에 분개하여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키다가 실패하였거나 세조의 조정에서 신하노릇을 거부하고 은둔 생활을 한 사람들을 절의파라고 한다. 성삼문(成三問) 등의 사육신(死六臣)과 김시습(金時習) 등의 생육신(生六臣)이 이에 속한다. 이들의 절의는 뒤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 등으로 계승되었다. 전극례도 이 절의파의 일원으로 후대 진안 지역 의병 활동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