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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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謠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현심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구전되는 민간 혹은 민중의 노래.
[개설]
민요는 민중의 애환이 깃든 구전 노래로써,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쉽게 부르고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진안 지역의 민요는 성수면과 마령면 등의 남부 민요와 정천면과 안천면 등의 북부 민요로 나뉜다. 남부 민요는 전라북도 임실군과 비슷하고 육자배기 토리 형식을 띠며, 북부 민요는 전라북도 무주군과 비슷하면서 경상도의 영향으로 메나리 토리 형식을 띠고 있다.
진안군의 민요는 대부분 일정한 후렴구 없이 남녀 집단 혹은 양편 집단, 또는 개인과 개인의 교환창으로 불린다. 소박하고 단순한 느낌을 준다. 후렴구의 분화가 없다는 것은 노동 집단의 강한 결속력과 지형적 고립성 및 노동 집단의 소략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강한 결속력이 없다면 후렴구 없이 선창을 바로 받아 부르는 교환창 형식으로 부를 수가 없다.
진안에서 전승되는 민요를 기능 위주로 나누어 보면 제의요, 노동요, 부녀요, 기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제의요]
진안 지역의 대표적인 제의요로는 「상여 소리」를 들 수 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동네 계원으로 구성된 마을 사람들은 합심하여 사흘 동안 장례 의식을 치렀다. 마을마다 「상여 소리」를 잘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있었고, 그들의 선창으로 이루어지는 「상여 소리」는 온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망자를 추모하도록 이끌었다. 꽃상여 앞머리에 올라가 요령을 흔들면서 선창하던 「상여 소리」의 가사가 구슬퍼서 동네 사람들은 동구 밖까지 따라 나가며 울곤 하였다. 진안의 「상여 소리」는 자칫 불결하고 무섭게 여겨지던 장례 행위를 격조 높은 의례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망자를 그리워하고 삶의 허망함을 노래함으로써 시신을 장지까지 옮기는 행위를 숭고한 의례로 승화시킨 것이다.
진안 지역의 「상여 소리」는 선소리꾼이 1~2소절을 선창하면 상두꾼들이 후렴처럼 “어허홍 어허홍” 또는 “어화 넘차 너화” 등을 반복적으로 받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여 소리」 가락의 이 같은 특징은 상두꾼들이 박자를 맞추어 돌다리나 좁은 산길도 무난히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때 선소리꾼은 창의적으로 선소리를 만들 수가 있다. 선소리꾼의 구성지고 애달픈 노래 소리를 2013년 현재 진안의 40~50대 이상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진안 지역은 2000년대 초까지도 꽃상여를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산촌 마을이기 때문에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기보다는 산에 묻는 것을 당연시 여겼기 때문이다. 선산이 없는 사람들은 산주가 배려하여 산소를 쓸 수 있도록 땅을 내주기도 하였다.
1. 「상여 소리」2
〈메김〉어화 넘차 너화 〈받음〉 어화 넘차 너화
〈메김〉설혼 세명 우대군들〈받음〉어화 넘차 너화
〈메김〉북망 산천이 머다더니/ 문턱 넘어가 북망일세〈받음〉 어화 넘차 너화
2. 「상여 소리」2
〈메김〉세상천지 만물지중 〈받음〉 어허홍 어허홍
〈메김〉사람 밖에 또 있는가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여보세요 대매군들 〈받음〉 어허홍 어허하
〈메김〉이내 말씀 들어 보소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이 세상에 나온 사람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뉘 덕으로 나왔는가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석가여래 공덕으로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칠성님전 명을 빌고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제석님전 복을 빌어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아버님전 뼈를 빌고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어머님전 살을 빌어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이내 일신 탄생하니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그지없기 한량없네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한두 살에 철을 몰라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부모은공 다 못 하고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이삼십에 당도하니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어이없고 애닲고나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부모은공 못 다 갚고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웬수 백발 돌아오니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절통하고 서럽도다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인간 칠십 고래희라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없든 망령 절로 나네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우리 인생 늙어지면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다시 젊지 못 하리라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인간 백년 다 살아야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병든 날과 잠든 날과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걱정 근심 다 제하면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단 사십을 못 사느니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어제 오늘 성한 몸이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저녁나절 병이 들어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부르나니 어머니요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찾나니 냉수로다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인삼 용약 약을 쓴들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약 효험이 있을쏜가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판수 불러 석경하고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사탕에 수족 씻고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촛대 한 쌍 밝혀 놓고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소지 한 장 드린 후에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비나이다 비나이다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부처님전 비나이다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명사십리 해당화야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꽃 진다고 서러 마라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명년 삼월 돌아오면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다시 꽃이 피련만은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북망산천 멀다던데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북망산천 웬 말인가 〈받음〉어허홍 어허하
〈메김〉애통하고 서럽고나 〈받음〉어허홍 어허하
「상여 소리」1은 중중모리 장단으로 되어 있다. 선소리꾼이 1∼2장단의 선소리를 메기면 상두꾼들이 한 장단의 뒷소리를 “어화 넘차 너화” 하고 받는다. 이 소리의 선율은 구성 음이 ‘미-라-시-도-레-미’이고, 주요 음이 ‘미-라-시’로써 4도+2도 구조를 지니고 있다. ‘미’에 떠는 목, ‘시’에 ‘도∼시’로 꺾는 목을 갖고, ‘라’나 ‘미’로 마치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어 처량한 느낌을 준다. 「상여 소리」2는 선소리꾼이 1장단의 선소리를 메기면 상두꾼들이 “어허홍 어허홍” 하고 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노동요]
진안 지역은 산이 많아서 밭농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콩밭노래」[「산타령」]와 「밭매기 노래」, 「메밀 노래」가 많이 불리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밭농사 노동요이다. 「밭매기 노래」에 등장하는 ‘금봉채’는 ‘금비녀’를 이르는 진안 지역의 사투리이다. 하루해가 졌는데도 남은 밭을 매다가 비녀를 잃었다는 상황으로 미루어 여인들의 한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진안의 노동요는 농사일에 매여서 효도조차 못하는 현실을 애달파하는 내용이 많다.
진안의 「밭매기 노래」는 메김과 받음이 없이 돌아가면서 한 소절씩 불렀다. 한 제보자가 동일한 「밭매기 노래」를 부르는데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사가 다르게 시연되는 것은 정해진 가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창자의 창의성이 많이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콩밭노래」
가세가세 깔[꼴] 비러 가세/ 아랫집 김도령 깔을 비러 가세/ 깔일랑 비어다가 망아지 주고 오호오/ 개미나리 뜯어서 단둘이 먹세/ …… 노랑노랑 삼베 치마/ 주름주름 향내가 나네/ 얼텅벌텅 저 남산 속에/ 우리도 죽으면 저 모양 되네 …….
2. 「밭매기 노래」
못다 맬 밭 다 맬라다 금봉채를 잃었구나/ 매꼭같이 지신 밭은 한 골 매고 두 골 매고/ 삼재 골을 거듭 맹개/ 울 어머니 죽었다고 부음이 왔네/ …… 저기 가는 저 상부 거그 조께 놓고 가소/ 너그마니 볼라커든 진잭이나 당허더나 …….
[부녀요]
진안 지역의 아낙네들은 밭일과 길쌈 등으로 밤낮없이 시달렸다. 끼니를 챙기고 아기를 돌보면서 잠이 늘 부족하였다. 이들이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삶의 마디마디에서 시름을 노래로 푸는 것이었다. 밤새워 삼을 삼으면서 「삼삼는 노래」를 부르고, 칭얼거리는 아기를 달래며 「아기 어르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가하면 「시집가는 노래」를 부르며 처녀 적 희망을 되새겨보기도 하고, 「시집살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고단한 삶을 승화시키려고 애썼다.
「삼삼는 소리」의 근간을 이루는 삼 삼는 작업은 삼베를 만드는 과정의 일부이다. 대마의 대궁을 증기로 쪄내면 껍질이 잘 벗겨지는데, 그 껍질을 가늘게 쪼개서 잇는 과정이 바로 삼 삼는 작업이다. 쪼갠 껍질의 한쪽 끝을 가른 뒤 다른 끝을 삽입하여 무릎에 대고 비벼서 한 올의 실로 잇는 것이다. 이 작업으로 인해 여인들의 무릎은 피부가 얇아지고 갈라진 찰과상의 흔적이 선명하였다. 이처럼 힘든 일을 하면서도 진안의 여인들은 노래를 불렀다. 그래야만 밤낮 없는 노동으로 인한 시름과 졸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삼삼는 소리」는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밤에는 잠을 쫓으며 길쌈을 해야 했던 진안 지역 여인들의 애환이 서린 노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시집살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성님 성님 사촌 성님/ 쌀 한 되만 재졌으면/ 성도 먹고 나도 먹고/ 누름 밥이 남았으면/ 성내 개 주지 내 개 중가”라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들의 삶이 얼마나 배고프고 애달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 「삼삼는 소리」
삼삼을 토파 대어 주소/ 누가 먼저 할 잘개 쉽게 너고/ 누가 먼저 삼가 보세
큰 베집으는 세 잘개 삼고/ 아래 부인은 두 잘개 삼네/ 그런 양반은 잘 삼은개 그렇지/ 우리는 한 잘개 밖에 못 삼네
2. 「시집가는 노래」
임실 땅에서 커 갖고 남원 땅으로 시집을 가니/ 얽고도 푸른 왜 그렇게 껌고도 푸리냐[푸르냐]/ 푸린 것이 내 탓이오 얽은 것이 내 탓이오/ 강남군에 손님님네[마마] 탓이로다/ 맥주병에 막걸리 들고 청주 은주 병에 청주 들어/ 그 술 한 잔 다 주었으면 백년언약을 못 허리까
3. 「아기 어르는 노래」
달깡 달깡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서울 가서 밤 한 토리 주서다가 시금창에 묻었더니/ 머리 감은 새앙쥐가 들랑날랑 다 까먹고/ 한 쪼가리 남았걸래 껍데기는 애비 주고/ 비늘은 에미 주고 알랑구는 너허고 나허고/ 갈라 먹응개 꼬숩고도 달드라
[기타]
진안 지역에는 기능요로서 구분하기 어려운 민요들도 전승된다. 부귀면 두남리에서 채록된 「동학 혁명 노래」와 용담면 와룡리에서 채록된 「아리랑」과 「사별가」, 진안읍 반월리에서 채록된 「담바구 타령」과 「화투 노래」가 대표적인 노래이다.
부귀면 두남리에서 전승되는 「동학 혁명 노래」를 보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뭣하러 나왔느냐/ 햇님 댓님 파릇 파릇/ 하절인줄만 알았더니/ 이화 춘풍이 날 속였네”라고 되어 있다. 고창에서 시발된 동학 혁명에 대한 비유가 진안의 산골 마을까지 전승되었다는 것은 동학 농민 혁명의 파급력이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