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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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常服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진명숙 |
[정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 주민들이 평상시에 입어 왔던 옷.
[전통 시대]
고려 시대 왕과 관리는 평상복으로 백저포(白紵袍)에 검은 건[鳥巾]을 썼고 조선 시대 왕은 상투관, 저고리, 바지, 답호, 철릭(帖裹), 두루마기 등을 입었다. 사대부의 평상복은 복건(幅巾), 방관(方冠), 정자관(程子冠), 동파관(東坡冠) 등을 취향에 따라 썼다. 신하들은 당건(唐巾)을 썼으며 외출 시에는 모두 갓을 썼다. 신발은 당혜(唐鞋)와 운혜(雲鞋)를 신었다. 조선 시대 궁중의 여인들은 저고리, 치마, 회장저고리 등을 입었으며 왕비는 당의(唐衣)를 입었다. 양반가 여인들은 저고리, 치마, 배자(褙子) 등을 입었다.
1449년(세종 31) 정월에 내린 금제(禁制)에 “서인(庶人), 공상천예(工商賤隸)는 직령(直領), 액주름[腋注音], 철릭[帖裹]을 통착한다.”라고 있어 직령, 액주름, 철릭이 서인복으로 지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다로운 금제로 인해 ‘백의민족’으로 지칭될 만큼 평민들의 복식 문화는 발달되지 못하였고, 염색이나 문양도 다양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평민들의 평상복은 주로 남자들은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다. 바지에는 행전을 치기도 하고 행전이 없는 경우 무릎 아래에서 끈으로 바지를 매어 활동하기 편하게 하였다. 기혼자는 상투를 틀고 흑립을 썼으며, 미혼자는 머리를 뒤로 땋아 늘였다. 여자들의 평상복은 저고리와 치마였다.
[근현대]
일제 강점기와 개화기를 지나면서 1912년 3월에는 용담 시장, 1918년 3월에는 진안 시장, 1923년에는 마령 시장이 개장되어 진안군에도 기성품 중심의 직물 및 평상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방 후 군정 법령 제90호에 의해 면포류(布絹類)·견직류(絹織類)·양말 등이 통제 품목이었고, 1947년 3월 26일에는 모직물·마직물·제복·작업복 등의 의류 등이 통제 품목이었음을 볼 때 평상복으로서의 저고리와 치마는 의례복으로 전환되고 서양복 차림의 일상복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00년대 중·후반까지도 진안군 주민들에게 한복은 일상복이나 외출복으로도 자주 이용되었다.
1917년 진안군 용담 금융 조합 총회 기념사진을 보면 남자들 가운데에는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사람들로 의복이 다양함을 알 수 있다. 1950~1970년대 전라북도 진안군 주민의 일상 사진을 살펴보면 양복과 한복이 혼용되고 있었다. 1949년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원덕현 마을의 한 결혼식에 사모관대와 한복을 입고 있는 신랑 옆으로 친구들은 모두 양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외출 시 또는 친구들과 의미가 있는 기념사진을 찍을 때 주로 한복을 입었다. 1959년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내봉 마을 처녀들이 함께 찍은 사진에는 옷을 통일하기로 약속한 듯 모두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고 긴 땋은 머리를 하고 있다. 1977년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상서 마을 주민들의 송광사 나들이에도 여자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다. 1974년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상덕 마을 회관 준공 기념 잔치에서 청장년의 남자는 주로 서구식 점퍼나 티셔츠 등을, 노인들은 저고리에 한복 바지를, 여자 어른은 주로 저고리에 치마를, 아이들은 오늘날과 같은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물론 1950~1960년대 성인 여자들도 주름치마나 블라우스 계통의 서구식 일상복을 입거나, 저고리 위에 스웨터 등을 입는 장면 등도 쉽게 목격되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치마나 블라우스 반팔도 입고 다녔다. 이 시대 아이들은 대부분 티셔츠와 면바지 차림인 것으로 보아 아이들의 평상복은 서구식으로 대부분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산업화 이후에는 기성복의 대량 생산으로 대부분 읍내나 장터에서 옷을 구입해 입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