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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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章里梁在浩所藏古文書 |
이칭/별칭 | 「평장리 송림 양재호 소장 고문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송림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선아 |
소장처 | 양재호 가옥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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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양원하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송림 마을에 거주하는 양재호가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개설]
송림 마을 양재호가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는 백운면 평장리 송림 마을 어귀에 세워진 ‘남원 양씨 2효 1열비’[1892]의 주인공인 양원하, 양명수, 의성 정씨와 관련된 것으로 호구 단자, 혼서지류, 상서 등이다.
[제작 발급 경위]
호구 단자는 사인이 관에 제출하는 것으로 4조와 부인, 그리고 딸린 식구들에 대해서 기입하여 제출한 문서이다. 혼서지, 혼배지, 연길 등은 모두 개인 간에 주고받는 문서로서 신랑 측과 신부 측에서 결혼 전에 주고받는 문서이다. 상서는 개인이 관에 제출하는 일종의 청원서이다. 양재호가 소장하고 있는 무인년에 작성한 상서는 암행어사에게 제출하였고, 각지의 유학들에게 연명으로 올린 것이다. 따라서 상서는 효자·정녀·열부[孝貞烈]에 귀감이 되는 것으로 포장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형태]
양근수와 양상정의 호구 단자에는 각각 부, 조부, 증조부와 외조부, 부인과 딸린 식구로 동생이나 아들, 며느리, 노비까지 기입한 것으로 전형적인 조선 시대 호구 단자이다. 혼서지, 혼배서, 연길 등은 사인 문서로서 신랑과 신부 측에서 각각 혼서 택일지와 허혼서를 주고받은 것이다. 상서는 양원하와 양명수, 그리고 의성 정씨의 효행과 열행을 포장할 것을 청원하는 것으로 암행어사에게 올린 것이다.
상서에는 제목, 내용, 연명자, 제사로 이루어진다. 제목에는 보통 상서의 주체, 거주지, 문서의 성격을 표시하며, 본문에는 상서를 하는 분명한 목적을 밝히며, 끝으로 본 상서에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을 연명하여 이것이 사림의 공론임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상서의 객체에 해당하는 관이나 암행어사의 처분, 즉 제사가 써진다.
무인년에 제작한 상서에는 임실, 김제, 고산, 용담, 금산, 익산, 전주, 고부, 임피, 무주, 흥덕, 여산, 곡성, 창평 등지의 유학 및 진사들의 연명이 있다. 따라서 이 상서의 이전에 이미 각 지역의 향교에 보낸 통문과 답통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이것들은 소장하고 있지 않다.
[구성/내용]
양재호 소장 호구 단자는 1876년 진안현 두미면 은천리 거주하는 양근수가 작성한 것이다. 양근수가 48세인 1861년, 54세인 1867년, 63세인 1876년, 66세인 1879년에 각각 작성한 호구 단자와 그 아들인 양상정이 나이 32세인 1884년에 작성한 호구 단자가 있다. 그리고 1878년[무인년]에 ‘여러 유생들이 양원하(梁源河)의 효행을 포장하도록 암행어사에게 올린 상서(上書)’가 있다.
1876년 양근수가 작성한 호구 단자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양근수의 아버지는 양종윤, 조부는 양후창, 증조부는 양성주이고, 외조부는 이운기이고 본관은 경주, 유학이다. 양근수의 부인은 파주 윤씨로 당시 52세이다. 아들 양상정(梁相定)은 유학으로 당시 17세이며 며느리는 제주 고씨로 22세[을묘생]이다. 거느리고 있는 노비로 경오생인 연복(連福)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878년에 작성한 상서는 낱장으로 되어 있으면서 일부 망실이 있으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부분의 망실에도 불구하고 내용상 양종윤의 효행과 그 아들 양명수 그리고 며느리인 의성 정씨의 열부행을 포장하자는 내용이다.
고문서에 따르면 ‘양종윤은 어머니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리자 정성을 다하여 병구완을 하였고, 갑자기 병 구환이 어렵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내어 입에 흘려 수일간 목숨을 연장하게 하였다. 다음 해에는 부친이 지붕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서 이미 구완하기 어렵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찾아 나섰는가 하면 지성으로 기도를 하면서 효(孝)를 다하였는데, 천우신조로 한 의원을 만나 완쾌할 수 있었다. 후에 다시 어려움을 당하자 자기 살을 베어 약으로 써서 목숨을 3일간 연장하였다고 한다. 그 아들 명수(命洙)와 며느리 의성정씨 또한 선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를 다하였다. 명수가 여러 해동안 고질병을 앓다가 지난 임신(壬申) 5월 이후로 병세가 점점 나빠져서 회생할 길이 없었을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마시게 하여 하루 반나절 동안 목숨을 연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평장리 양재호 소장 고문서는 남원 양씨 2효 1열비와 관련이 있는 상서류와 집안 후손들의 호구 단자이다. 당시 정려를 받기 위하여 효정열을 추숭하기 위해서는 사림들의 공론이 있어야 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이 상서에 나타난 전라도 각지에 통문을 보냈고, 그에 대한 답통의 결과 연명할 수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상서류와 호구단자는 당시 개인의 가족 규모 및 당시의 문서 행정을 엿볼 수 있는 문서로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