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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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濟學 |
이칭/별칭 | 중열(仲悅),습재(習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대길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 최제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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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최제학 무성 서원에서 거의 |
몰년 시기/일시 | 1959년 - 최제학 사망 |
저서 발행 시기/일시 | 1963년 - 『습재실기』 간행 |
추모 시기/일시 | 1988년 - 애국지사 습재 제학 선생 기념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제학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최제학 출생지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목동 마을 |
활동지 | 최제학 은거지 -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학동 |
묘소 | 최제학 묘소 -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방사동 |
기념비 | 애국지사 습재 제학 선생 기념비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목동 마을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탐진(耽津) |
[정의]
일제 강점기 진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중열(仲悅), 호는 습재(習齋). 아버지는 지은(芝隱) 최성호(崔成鎬)이다.
[활동 사항]
최제학(崔濟學)[1882~1959]은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에서 태어났다. 최제학은 일찍이 이기회(李起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아버지의 삼년 상을 마친 1896년(건양 1)부터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간재(艮齋) 전우(田愚)·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 당대 여러 대학자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나, 면암을 흠모하여 사제의 의를 맺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통분한 면암과 함께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킬 방책을 모색하였다. 1906년(광무 10) 4월 면암을 중심으로 임병찬(林秉瓚) 등과 함께 정읍 태인의 무성 서원에서 의거(義擧)하였다. 이때 참모직을 맡아 의병 소집 및 군비(軍備)를 편성하여 활동하였는데, 불행히도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4개월간 감금을 당하였다. 출옥 후 대마도로 면암을 찾아가 극진히 간병하였는데, 끝내 면암이 순국하니 부산으로 운구(運柩)를 모셔와 장례를 극진히 하였다. 사람들은 “면암이 없으면 습재도 없고, 습재가 없으면 면암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뒤 고향에 돌아와 고산(高山) 윤자신(尹滋臣)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 후로는 두류산(頭流山)을 오르내리며 통한(痛恨)의 시간을 보내다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학동으로 옮겨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습재실기(習齋實記)』는 1963년 석판본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방사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8년 ‘애국지사 습재 제학 선생 기념비(愛國志士習齋濟學先生紀念碑)’가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목동 마을에 건립되었다. 호남 의병의 항일 투쟁 때 공적이 인정되어 1990년에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