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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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最洙 |
이칭/별칭 | 충민,사원(士元),동양(桐陽)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개항기에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양(桐陽). 아버지는 임익진(林翊鎭)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용진(尹用鎭)의 딸이다.
[활동 사항]
임최수(林最洙)[1853~1895]는 1891년(고종 28)에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이 되었고, 1895년 시종원(侍從院) 시종(侍從)에 제수되었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의 변을 당할 때 임최수는 시종원 시종으로 일본 낭인들에게 구중궁궐이 짓밟히는 현장을 역력히 보고 통탄하였다. 그런데 사변 후 관료들이 주모자 색출과 처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정부 관료 및 동리 수 백 명과 군관 천 여 명을 규합하고 지휘하여 역적 괴수와 친일파와 소탕하고 일본인을 몰아낸 뒤에 내각을 혁신하고자 거사 일을 정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배신해 서리 군부 대신(署理軍部大臣)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해 어윤중의 선무공작(宣撫工作)으로 거사에 실패하고 도리어 체포당하고 말았다. 체포된 뒤에 혹독한 심문에도 모의한 동지 한 사람도 말하지 않고 마침내 이도철(李道徹)과 함께 같은 날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동양 유고(桐陽遺稿)』 1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1896년 특명으로 복관되고, 내부 협판으로 승진되었다. 또한 충민(忠愍)이란 시호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