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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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鎭旭 |
이칭/별칭 | 화삼(華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개설]
1906년 최익현의 창의에 가담하기 위해 『동맹록』에 서명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은둔 생활을 하다가 한일합방 후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체포되었다.
[가계]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화삼(華三), 호는 호암(壺岩).
[활동 사항]
장진욱(張鎭旭)[?~?]으로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1906년 봄 면암 최익현이 호남으로 와 창의할 의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3월 6일 면암을 찾아가 참여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최재학과 함께 가산을 처분하여 군량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윤4월 8일에는 면암이 담양의 용추사로 가서 기우만 등 호남 유생 50여 명과 만나 창의할 것에 합의를 보고 『동맹록』을 작성하였는데 거기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순창에서 면암 등이 의병군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면암과 순창의 12의사가 일본 군경에 잡혀가게 되자 면암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왜인은 이른바 호적령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모든 한국 사람은 이에 따라 호적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장진욱은 당당한 동방의 예의 민족이 왜적의 백성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며, 당연히 입적을 거부하였다. 또 왜인이 태인의 무성 서원의 토지를 강탈하자, 앞장서서 열읍에 격문을 발하고 회수를 위해 투쟁하였다. 1919년 고종 황제의 장례식 때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으며 그 후 상해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남원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수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 식음을 전폐하여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