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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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진안 출신이거나 진안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개항과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국권 회복 운동으로서 독립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특히 호남 지역은 일제에 저항하는 무장 의병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진안 또한 1905년 이래 호남 의병의 결성과 저항의 중심지로 활약하였고, 3·1 운동에도 주도적으로 만세 운동이 전개되는 등 저항 정신이 고취된 곳이다.
[진안 지역의 의병]
개항기의 의병 활동과 관련해서 진안에서는 2차 의병[을사·정미 의병, 1905~1906] 활동기에 항일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먼저 임실 출신의 이석용(李錫庸)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의진(湖南義陣)이 진안군 마이산에서 ‘호남 의병 창의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어 진안, 용담, 정천, 임실,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참가한 진안 출신의 항일 의병들은 김사범(金士範), 김성학(金成學), 김암우(金岩宇), 김운서(金雲瑞), 박금동(朴金東), 박보국(朴甫局), 박학수(朴學水), 서성일(徐聖一), 신성운(申成雲), 오기열(吳琦烈), 임영기(任永基), 임종문(林宗文), 전성학(全成鶴), 정종엽(鄭鍾燁), 한사국(韓士國) 등이 있다.
또 경상남도 안의 출신의 문태수(文泰洙)[일명 文泰瑞]가 1907년 정미조약 체결 이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무주에서 거병하여 덕유산을 근거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에 참가한 진안 출신 의병은 김경선(金京先), 명경안(明敬安), 박순용(朴順用), 박학수(朴學水), 성진갑(成辰甲), 신치수(辛致守), 심낙광(沈洛光), 심대유(沈大有), 심우상(沈尤相), 안왈오(安曰五), 유환기(柳煥基), 조경화(趙京化), 하준태(河俊太), 한청여(韓淸汝) 등이 있었다.
더불어 완주군 고산면 출신인 유지명(柳志明) 또한 ‘삼남 의병 대장’이라 칭하며, 1907년 9월 22일에 진안군 용담면 건무리에서 교전하는 등 용담, 고산, 은진 일대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는데, 이에 참가한 진안 출신 의병은 김치삼(金致三), 박순용(朴順用), 정성일(丁成一) 등이 있었고, 백운면 오정리 출신의 황준성(黃俊聖)과 그밖에도 김봉조(金奉調), 김옥현(金玉現), 박경실(朴景實), 원용구(元容九), 조진봉(趙辰奉) 등이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의병 부대에 종군하며 활동을 하였다. 충청남도 회덕 출신 무과 승지 김동신도 창의하여 진안·무주·장수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진안 지역의 독립운동가]
3·1 운동 시기에는 진안에서도 1919년 3월 25일부터 4월 13일까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진안읍에서는 3월 25일 장날에 수 백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3일에는 진안군 추천면 주양리에서 김주한(金周漢)의 주도로, 학생 양해관(梁海寬) 등이 만세 운동을 벌였다. 또 4월 6일에는 오기열(吳基烈), 전영상(全永祥), 김구영(金龜泳), 황해수(黃海水) 등이 주동하여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수 백 명이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4월 12일에는 성수면 도통리에서 전경원(全京元)의 주동으로, 다시 마령면에서 4월 13일에는 오기열, 전영상 등이 장날을 기해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마령 시장의 만세 운동 후에도 진안군의 인사들은 기회가 있는 대로 시위 운동을 계획하거나 또는 산발적인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중 주천면의 청년 김영필(金永弼) 등은 『대한민보』, 『독립신문』 등 독립운동 관계 신문이나 자료를 무주군 등지에 배포하면서 활동을 계속하다가 붙잡혔고, 이듬해인 1920년 1월에는 주천면의 면서기였던 김규현(金奎鉉)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후 엄혹한 일제의 통치 시기에서도 1929년 4월 28일에 마이산 내의 성지동과 그 밖의 장소에 매월 1~2회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기원제(祈願祭)를 실행하다 보안법으로 체포되어 1938년에 징역 1년을 선고 받은 김석락(金錫洛)이나 진안면 군상리 출신으로 대동아 공영권 확립은 불가능하니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은 일본이 패전하여 국력이 약해질 때 총궐기하여 독립하자고 말했다가 치안 유지법, 육군형법 위반, 조언비어(造言蜚語) 유포 등으로 1942년에 1년 6월을 선고 받은 신석창(辛錫昌) 등의 활동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