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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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升吉 |
이칭/별칭 | 평중(平仲),남계(南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남 |
묘소 | 원승길 묘소 -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이진리[현 시흥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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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 원승길 신도비 -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 마을 |
성격 | 문인|의병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의병.
[개설]
이산묘에 배향된 것은 후손들이 진안 지방에 세거(世居)하며, 이산묘 창건 당시부터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평중(平仲), 호는 남계(南溪).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판서를 지낸 원계검(元繼儉)이고 할아버지는 승지를 지낸 원호영(元虎英)이고 아버지는 충의공(忠毅公) 원성모(元成模)이다.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문절공(文節公) 구홍(具鴻)의 후예인 선전관 구정(具正)의 딸이다.
[활동 사항]
원승길(元升吉)[?~?]은 성품이 근실하고 겸손하였으며, 충정공(忠貞公) 이홍주(李弘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일찍부터 문무(文武)를 익혔다.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승길은 아버지와 동생 원이길(元餌吉)과 더불어 나라를 위래 순절할 것을 맹세하고 의진을 설치하니 곳곳에서 의병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종실 영가군(永嘉君)과 협력하여 의병을 이끌고 분전했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안산을 버리고 덕물도로 들어갔으나 청군의 화공(火功)을 받아 끝내 1637년 음력 정월 13일에 세 부자가 순절하고 말았다. 덕물도 절벽에는 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거무스레한 흔적이 남아 3충의(三忠義)를 되새기게 한다.
한편 원승길과 부인인 능성 구씨(綾城具氏)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남편인 원승길의 소식을 듣고 쏟아지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따라 죽기로 스스로 맹세하였으나, 아들 원광옥(元光玉)이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를 위에서 감싸고 통곡하니 적들도 의롭게 여겨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한다. 능성 구씨는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은 채 남편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예(禮)를 마친 후 아들을 데리고 진안 옥천(玉川)[용담]의 와은동(臥隱洞)[평은리]으로 와서 살면서 세상을 마쳤다. 이후 자손들이 진안과 장수 등지에 널리 퍼져 큰 성씨를 이루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이진리[현 시흥시]에 아버지 충의공의 묘소 왼쪽에 있으나, 아들인 원광옥을 데리고 진안으로 내려온 능성 구씨의 묘는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설암산(雪巖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전쟁이 끝난 후 자손들의 상소를 받은 조정에서 무과 선전관 훈련 도정 이조 참의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좌찬성 원릉군(原陵君)으로 추증하였다. 원승길 신도비가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 마을에 있다. 비문은 1869년(고종 6)에 밀양 부사(密陽府使) 원세철(元世澈)이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