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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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東俠 |
이칭/별칭 | 개부(蓋夫),모와(慕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의병.
[개설]
진안 이산묘에 배향된 것은 후손들이 진안 지방에 세거(世居)하며, 이산묘 창건 당시부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부(蓋夫), 호는 모와(慕窩). 대사성을 지낸 정곤(鄭坤)의 7세손이며 상호군(上護軍) 정건(鄭鍵)의 아들이다. 외증조할아버지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활동 사항]
정동협(鄭東俠)[1593~1657]은 효성이 지극하여 12살에 아버지가 죽자 3년간 정성껏 시묘 살이를 하였으며,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15년(광해군 7)에 어머니 병이 위중하자 하늘에 눈물로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병을 다시 회생시켰다 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는 등 나라가 위급한 때에 이르자, 숙부되는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䂓)에게 의병을 일으킬 뜻을 전하고, 첫째 아들로 하여금 병중인 어머니와 마이산(馬耳山) 지천리(枝川里)[현 운천리]로 피신하도록 하고, 숙부 및 둘째 아들과 함께 가동(家童) 수 십 명을 거느리고 전응철(全應哲)·전응종(全應鍾) 형제 및 신성식(辛成式)과 더불어 군량을 모아, 여산(廬山) 모의소(募義所)로 갔다가 다시 과천까지 진군하였는데 이미 청(淸)과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순국하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며 되돌아왔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의 천거로 예빈시 정(禮賓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사적이 『호남 절의록』에 쓰여 있으며, 청주(淸州) 한기유(韓起愈)가 지은 행장(行狀)이 전해 오고 있다.